앞으로의 나의 글쓰기에 관하여
태어나 처음으로 '글쓰기 모임'을 한다. 내일은 마지막 날. 잔인한 달 4월은 '글쓰기 모임'으로 나를 지키고 돌본다. 고수리 작가가 이끄는 '고유글방(글쓰기모임)' 소개글에 '안전한 글쓰기 공동체'라는 문구가 나를 그곳에 데려다주었다. 꿈처럼 아득한 온라인 세계가 아닌, 진짜 얼굴과 내 귀에 바로 꽂히는 목소리를 들으며 글을 나누고 싶었다.
고유글방을 시작할 때 배수아 작가의 <작별들, 순간들>을 읽기 시작했다. 지난 일요일 밤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었다. 그의 책을 제대로 읽은 일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녀의 말대로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닫는 순간 이 책에 담긴 모든 것을 잊어버렸지만, 나는 이 책과 나란히- 이 책을 따라서- 이 책과 안전하게- 한 달 동안 나를 지켜보는 글쓰기를 했다. 하루의 고요하고 애틋했던 나만의 시간이었으므로. 에필로그의 마지막 문단을 읽는데 '지금 여기가 맨 앞이다(이문재 시, <지금 여기가 맨 앞>)'라는 문장이 떠올라 마지막 페이지에 시를 써 두었다.
4월의 첫째 주에는 '나를 만든 기억들'을 썼다. 내가 충분히 사랑받았던 옛 기억들을 떠올려 적어보니 생각보다 훨씬 더 생생하더라. 그 느낌이 나를 만들었구나 알게 되었다. 이것이 맞다면 지금 내 아이도 나의 사랑을 흠뻑 받고 있다 느끼길- 더불어 이미 거의 다 만들어진 내가 딸과 주고받은 사랑으로 훗날 완성되길 바라는 마음이 깃들어 있다.
둘째 주는 일상에세이(일상에서 마주친 뭉클함에 관하여)를 써보는 시간들이었다. 4월 내내 아이는 아프고 남편과 한바탕 싸우기도 했고 우중충하고 미세먼지 가득한 날씨까지. 일상에서 마주치는 뭉클함에 대해 유감스럽게도 전혀 쓸 수가 없었다. 네이버사전에 들어가 '마주치다'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내가 처한 경험의 한계에 벗어나 내게 주어진 생활환경을 떠올려보며 자주 혹은 간혹 마주치는 이웃 사람들부터 써 내려갔다. 때마침 <작별들, 순간들>에서는 책 내내 작가가 만나는 자연의 풍광들을 세세하게, 애정 어린 시선으로 써놓은 문장들이 아주 많았다. 덕분에 그 장소가 어디인지 구글지도를 찾아들어가 누군가 찍어놓은 사진을 구경했다. 마가목, 로더덴드런, 엘더베리꽃, 비어가르텐, 자우어암퍼, 히스 황무지, 물닭, 잉걸불, 투야나무 같은 단어들을 찾아보고 독일의 자연을 엿보기도 했다. 어느 사이에 약간의 노여움과 슬픔의 감정이 피어올랐다.
셋째 주 글쓰기는 <작별들, 순간들>의 문장에서 비롯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감동과 아름다움의 사물들 중에는 언제나 빵이 들어 있었는데, 빵의 아름다움은 밑밭의 아름다움에서 나왔음을 알게 되었다(p.100)." 밑밭의 아름다움이라니! 한 가정의 끼니를 담당하는 엄마가 되면서 식사를 할 때 단순히 그 음식만을 먹는 상태에서 벗어나 있게 되었다. 식재료의 다양하고 아름다운 빛깔부터 재료의 출처, 그 요리와 함께한 추억들까지 함께 먹는 나를 발견했다. 그래서 어떤 날은 재료를 손질할 때에 채소들의 선명한 색상으로 벌써부터 맛있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된장에 담긴 엄마의 고된 수고로움과 따듯함으로 먹지 않아도 푸근해져오기도 한다.
4월의 마지막주는 내 마음에 남은 문장에 관해 쓰는 시간이다.
나무는 끝이 시작이다.
언제나 끝에서 시작한다.
실뿌리에서 잔가지 우듬지
새순에서 꽃 열매에 이르기까지
나무는 전부 끝이 시작이다.
지금 여기가 맨 끝이다.
나무 땅 물 바람 햇빛도
저 다마 모두 맨 끝이어서 맨 앞이다.
기억 그리움 고독 절망 눈물 분노도
꿈 희망 공감 연민 연대도 사랑도
역사 시대 문명 진화 지구 우주도
지금 여기가 맨 앞이다.
지금 여기 내가 정면이다.
<지금 여기가 맨 앞>, 이문재
좋은 책들, 인터뷰 기사들, 노랫말, 영화 대사 등등 세상에는 아름답고 멋진 문장들이 많다. 미술관을 가지 않아도 진짜 아름다운 것들이 여전히 공짜로 제공되고 있다 느낀다. 배수아의 <작별들, 순간들>은 베를린 서가의 주인과 함께 독일의 정원에서 쓰인 기록들이다. 정원에서의 시간과 동시에 일어난 일들을 쓰고 있다 말한다.
나는 그리워하는 것들이 많은 사람이었다. 좋아했지만 지금은 없는 존재들, 사라져 버려 안타까운 시간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어떤 그리움에 대해 늘 마음이 쏠려 매달려 있었던 것 같다. 오늘은? 그리워하는 것이 있는가? 그리워하지 않는다. 그리워하는 글쓰기에 시간을 줄 여유가 현재는 내게 없다. 나는 한 번도 어떤 글을 써보고 싶다 생각한 적 없지만 앞으로의 글들은 어쩌면 '지금 여기가 맨 앞'인 것처럼 쓰이지 않을까. 그리 쓰고 싶다. 내가 끝이라고 생각했던 시간들이 시작점이 되어 다시 맨 앞이 되는 것이다. 바로 오늘 마음에 남은 문장을 떠올려 시작하는 것이다. 가볍고 멋진 일이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