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자주 읽을 때 주의력도 깊어집니다. 여기에 몸을 많이 쓰면, 몸은 더욱 깨어납니다. 깨어난 몸은 내 일상의 일정 부분을 보호해줍니다. 몸을 잘 읽고 쓸 때 좋아지는 마음들이 있어요.
* 감각을 덜 좇는다
예전부터 발레리나, 리듬체조 선수나 아이돌 댄스 가수를 보면서 늘 궁금해했어요. 저들은 평범한 이들보다 몇 배로 더 체력을 쓰는데, 어째서 성인의 기초대사량에도 못 미치는 식사를 해도 괜찮은 걸까? 은퇴하고 나서도 호리호리한 몸매를 유지하는 걸로 보아서 저런 특수한 체질이 타고나는 게 아닐까? 갸날프게 보이지만 체력이 좋고 아주 적게 먹어도 근육이 잘 잡히는 축복받은 체질의 사람이 인류의 한 0.001퍼센트가 있다, 같은 가정을 해보기도 했어요.
분명히 체질은 타고납니다. 그러나 움직임과 먹기의 관계가 상식적으로 아는 것과 다른 이유도 있더군요. 요가를 열심히 하는 시즌에는 훨씬 더 먹어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가만히 앉아서 일만 하는 시즌보다 적게 먹게 되더군요. 저만 그런 게 아니고 요기들이 공통적으로 다 겪는 일이죠.
어떤 운동이든 초반에는 평소보다 입맛도 더 당기고 땀 좀 뺐다고 보상심리가 생겨서 더 먹는 일이 벌어집니다. 운동하러 다니다가 살쪘어, 하는 푸념은 초보자들이 흔히 겪는 일이죠. 그런데 그 단계가 지나고 자기 관리의 습관이 잘 자리잡히면 운동을 열심히 해도 평소보다 조금 덜 먹게 됩니다. 그러다 홀릭 하는 단계로 넘어가면 거기에서 양이 더 줄곤 합니다.
'참 신기하다. 그렇게 땀을 흘리는데 어째서 덜 먹히지?'
덜 먹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기보다는 덜 먹힌다가 맞는 표현 같아요.
호흡에 신경 쓰면서 몸 감각에 집중하는 시간이 몸에 차곡차곡 쌓이면, 어느 때부터는 수련 또는 운동, 명상 후에 오감을 자극하는 일 자체가 하기 싫어져요. 너무 배가 고팠는데도 수련한 바로 직후에는 식욕이 뚝 떨어지기도 합니다. 평소라면 별 문제없이 먹는 떡볶이도 수련한 다음에 바로 먹으면 너무 양념이 강하다는 생각이 들죠. 그러니까 미각만이 아니라 냄새도 예민해져서 마냥 맛있는 길거리 호떡 냄새도 매우 느끼하게 다가오죠.
미각과 후각만이 아닌 오감 모두가 수련한 시간의 절반쯤은 예민해 있어요.(물론 그 시간이 지나면 바로 익숙한 습관에 딸려가요!) 몸 감각에 주의를 기울이고 호흡을 느끼는 시간을 두어 시간 갖고 나면, 일상의 소리도 너무 시끄러워요.
식당에 가서 들리는 음악 소리도 텔레비전 소리도 오토바이 소리도 갑자기 너무 시끄럽게 들립니다. 평소에는 오감에 굉장히 둔하게 살구나, 하고 알게 되죠.
향기숍에 들어간 적이 있으신가요? 처음에는 너무 좋은 향기, 조향사가 새로 개발한 향기 등에 취해서 황홀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그저 그래요. 그런데 향기숍을 빠져나간 후에는 머리가 띵합니다. 지나친 자극으로 과부화가 걸린 후각신경이 풀려나는 거예요.
우리 주변에는 늘 시끄러운 음악과 스마트폰의 볼거리, 자극적인 향과 맛 등 우리의 눈길 손길을 끌기 위한 것으로 넘쳐나요. 거리에는 수많은 자극들이 우리의 오감을 유혹하는데, 그런 환경에 있다 보면 우리 감각신경은 덜 시달리기 위해서 어느 정도 마비되게 마련이에요.
그런데 오감 자극이 거의 없는 곳에서 몸과 호흡에 주의를 두면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감각 신경이 정화되어 되살아납니다. 명상 후에는 보통 다른 사람들의 거친 마음을 잘 느낄 수 있거든요. 그것과 같이 몸의 감각이 정화되고 깨어나면, 감각적 자극이 너무 많은 세계에 살고 있음을 느껴요.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운동을 하고 나서 식욕이 조금 줄고, 감각을 따라다니는 일이 하기 싫어진다면, 그렇게 일어난 앎이 귀하다 하고 알아봐주세요. 정화된 몸이 알려주는 지혜가 그것입니다.
* 나쁜 습관에 덜 딸려간다
저는 술을 마시지 않지만, 가끔 술자리에 갑니다. 좋은 사람들끼리 술자리는 너무나 유쾌하고 즐겁잖아요. 술을 아예 마시지 않은 지는 7년쯤 지났나 봅니다. 원래도 술을 좋아하지 않고 주량도 형편없었기 때문에 뭔가 대단히 이겨내고 있는 건 절대 아닙니다. 삶에서 안 해도 괜찮은 것을 안 하는 것뿐이지요.
이제는 주변에서도 권하지 않아요. 술을 안 먹고 술자리에 있으면 재미가 있느냐 하고 물을 뿐이지요. 어떻게 보면 술 마시기와 요가의 효과가 겹치는 부분이 있어요. 둘 다 이완 반응을 이끌어냅니다.
과도한 긴장 상태의 몸-마음을 이완하면서 행복 호르몬을 올라오게 하고, 자아의식을 흐리게 만듦으로써 정서적 괴로움을 줄여주죠. 아마 술을 마시면 누구나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이 웃고 농담을 잘 던지겠지요.
그래서 수련자들이 술을 마시지 않아도 괜찮은 이유는 수련으로 술 마신 효과를 누리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거기에 숙취도 없고 건강도 좋아지며 실수도 적게 하는 등등의 장점도 있죠.
자, 그렇지만 대부분 수련자들의 권고 사항에 금주가 들어가는 까닭은 그보다는 이것이 아닐까 합니다. 바로 기대는 마음 자체를 경계하기 위해서!
한번은 명상 중에 지금 내가 예순 살이라면 하고 떠올려보니 기가 막혔습니다.
‘어쩌다 예순 살이나 되었지? 이게 말이 돼?’
‘제대로 살아온 게 맞나? 나는 너무 형편없다.’
누구나 할 법한 온갖 생각과 감정을 디테일하게 느꼈습니다. 후회와 당혹감이 너무 진하게 들었고, 한편으론 살아 있으니 살 뿐이지, 그런 반쯤은 내려놓은 마음도 들었죠. 아마도 지금 예순 즈음인 이들의 마음 깊숙이는 이런 생각이 깔려 있을 테지요.
삶의 회환과 굴레는 나이를 먹을수록 더 많이 느낄 겁니다. 살면서 해온 실수들이 더 늘어날 테니까요. 그렇다면 정말 술 마시고 싶은 기분이 들 것 같아요. 술이나, 아니 술과는 비교할 수 없는 더 강한 물질과 행위들에 기대고 싶을 겁니다.
끔찍한 불행까지는 아니더라도 보편의 불행은 누구나 공평하게 맞을 테니까요.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울적해지니까, 아마도 술이나 술보다 강한 것에 기대고 싶을 겁니다. 그런데 상황이 너무 안 좋으면 누구라도 제어하기 어려울 거예요. 이때 의지력으로 마냥 참아야 한다면 너무 괴롭지 않을까요?
만약에 몸의 언어와 이미 친해져 있다면, 기본적으로 몸에 해로운 것을 몸이 알아서 가리게 될 거예요. 술을 먹고 싶어도 술을 몸에서 거부하는 바람에 많이 못 먹는 식이 되죠. 평소에 몸 감각을 예민하게 깨워놓으면, 위기 상황이 와서 마음이 너무 힘들 때, 몸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술 마시지 말아야지, 담배 피지 말아야지 다짐하지 않아도, 몸이 지혜를 발휘해서 적정선에서 보호해줍니다. 신기한가요?
호흡 수련을 열심히 했던 한 분은 담배를 오래 피웠는데, 담배를 피우고 싶어도 못 피게 되어버리더군요. 그전에는 담배를 끊어야지 마음먹었다가 실패하고를 반복했는데, 호흡 근육이 깨어나고 몸 감각이 열리니까 몸에서 담배 연기를 받아들이기 어려워져서 담배를 물었다가도 놓는 일이 반복되다가 자연스럽게 끊고 말았지요.
이건 다이어트 이야기와도 연결되어요. 예전에 저도 다이어트를 하려면 절제를 해야 한다고만 생각하고, 역시 다이어트는 독한 사람들이 성공하는 거라는 ‘의지력’의 문제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몸의 감각을 계속 깨워나가는 수련 시간을 가지면 기본적인 조절은 됩니다.
물론 연예인처럼 관리하려면 훨씬 많은 시간과 돈, 에너지를 들여야 하겠죠.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스스로 생각하는 마지노선을 넘어가지는 않아요.
다만 수련이 게을러지면 케이크가 맛있고, 라면과 떡볶이가 자주 생각납니다. 그러나 수련에 좀 더 성의를 쏟으면 음식부터가 달라져요. 인스턴트 음식은 별 맛이 없고, 채소 맛을 민감하게 더 느낍니다. 몸의 감각을 주의 깊게 읽는 시간과 먹을거리는 관련성이 많아요.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섣불리 뭐를 끊자, 새로운 다이어트식 뭐뭐를 따라 하자고 마음먹지 말고, 길게 보면서 몸 감각을 깨워 가면 오히려 실패 없는 다이어트가 될 수 있어요.
그리고 만약에 지금 자신의 의지력을 탓하며 괴로워하는 습관의 문제가 있다면, 먼저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싶어요. 오히려 그렇게 괴로워하는 건 나쁜 습관에 괴로운 마음까지 얹어서 더 나쁘게 작용할 수 있죠.
어떤 나쁜 습관이라도 그것은 다 자신이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해서 생겨나요. 또다시 자신을 다그치는 것으로는 절대 나아지지 않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라, 그게 어렵기 때문에 몸을 움직이고 몸 감각이나 호흡에 주의를 기울이는 거예요. 일종의 우회로로 자신에게 보내는 사랑이죠. 지금 내 몸에 마음을 두는 연습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 생각이 좀 준다
가수 아이유가 안 좋은 기분이 올라오면 그 기분에지지 않으려고 설거지라도 한다는 인터뷰를 본 적이 있어요. 생각으로 없는 병도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몸을 덜 움직이면 생각이 더 일어납니다. 동의보감에 보면 너무 편안하면 병이 난다는 대목이 있어요.
구선이 말하기를, “사람이 노곤해지는 증상이 까닭 없이 발생하는 수가 있으니, 반드시 무거운 것을 들거나 가벼운 일을 붙들고 종일토록 힘써 움직이는 데서 오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한가한 사람에게 이 병이 많이 생긴다. 대개 한가하고 편안한 사람은 흔히 운동을 하지 않고, 배불리 먹고 앉아 있거나 잠이나 자기 때문에 경락이 잘 통하지 않고 혈맥이 응체되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운동하지 않고 배불리 먹고 잠이나 자면, 기가 잘 통하지 못하고 피가 잘 흐르지 못한답니다. 16세기 사람의 기준으로 보면 현대인 거의 모두는 그런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요?
물론 복잡한 지하철에 고단한 몸을 싣고 다크서클을 화장으로 가려가며 일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몸은 한가하고 생각이 복잡한 일을 많이 하지요. 그리고 분명 하루 열 시간쯤을 정신적 긴장 속에 살면 몸은 한가해도 계속 피로를 느낍니다.
무기력하고 귀찮고 나른한 이유 중에는 몸이 지나치게 한가하고, 머리만 많이 굴려서일지도 모릅니다. 온갖 미디어 때문에 생각이 많아지는 것 같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머리만 굴릴 때 일어나는 일이에요.
무릇 한가함은 몸이 아닌 마음에게 허락해야 합니다.
책만 보는 바보 이덕무는 시장통 속에서 한가함을 누리는 법을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그가 시장 옆에 살 때였습니다.
해가 뜨면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시끄럽게 떠들어 대고 해가 지면 온 동네 개들이 어지럽게 짖어 댄다. 그 속에서도 나는 편안히 글을 읽는다. 때로 집 밖에 나서 보면 땀 흘리며 뛰어가는 사람도 있고, 말을 몰아 내달리는 사람도 있다. 또 수레와 말이 섞여 복잡하게 오가기도 한다. 그 속에서도 나는 홀로 천천히 걸어갈 뿐이다. 이는 모두 내 마음이 한가하여 그 소란함에 나의 한가함을 빼앗기지 않기 때문이다.
* 감정이 고요해진다
몸은 거짓말을 할 줄 몰라요. 어제 많이 먹었으면 무거워져 있고, 어제 신경 쓰는 문제로 괴로웠으면 뒷목이 뻐근해요. 집착하는 생각에 갇혀 있을 때, 몸의 감각을 감지하기 어렵죠. 몸의 감각을 감지하는 건 매우 단순한 일이라서 탐정처럼 수사하듯 몸의 통증을 찾아다니며 원인을 추궁할 필요는 없어요. 단순한 귀 기울임이 필요해요.
몸을 아예 읽지 않고 살면, 어느 날 목이 몹시 뻐근해졌을 때 깜짝 놀랍니다. 아니, 왜 이렇지? 꼭 피해자가 된 것 같아요. 아픈 이유를 몰라서 마냥 두려워하기도 하고요. 아주 조금씩이지만, 그나마 그 조금의 변화를 알아차릴 줄 알면, 아직은 작은 통증이기 때문에 컨트롤할 수 있답니다.
이렇게 소소한 알아차림은 병의 예방 차원에서도 필요하지만, 감정의 기복도 들여다보게 도와줘요. 감정이란 어느 날 어떤 사건으로 갑자기 덮쳐온다고 이해하기 쉽지요. 하지만 감정 또한 조금씩 몸에 새겨져요. 어제 친구 때문에 마음이 너무 상해서 꽁하게 있었다면, 몸 어딘가에 감정적 체기가 뭉쳐 있어요. 또 모처럼 기분이 좋아서 편안했다면 콕콕 가볍게 쑤시던 배앓이가 사라지기도 하죠.
자기 몸의 감각을 잘 청진하면 큰 감정을 알아봐주고 넘어가기 때문에 감정적 찌꺼기가 덜 쌓여요. 자기 마음을 어두운 지하실에 잠가두지 않고 환기를 계속 시켜주니까요. 뭐든 지하실에 집어넣고 문을 잠가둘 때 공포로 바뀝니다. 그러나 지하실이어도 문을 자주 열고 햇볕을 들이면 무섭지 않은 공간이 될 수 있어요.
만약에 운동을 열심히 하는 편인데, 그것이 감정 조절과 아예 무관하다면, 운동을 어떻게 하는지 돌아보길 권합니다. 운동만이 아니라 몸을 쓰는 행위 자체로 감정을 잘 털어낼 수 있는 시간이 되기 때문이에요.
나쁜 감정을 발산한다, 그것도 좋지만 편안한 감정을 유지한다, 이 감각이 더욱 좋습니다. 좀 더 편안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면 정말 좋은 신호죠.
‘아! 운동하는 시간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몸에 주의를 잘, 그러나 친절하게 기울인다면, 그 자체로 감정의 오르락내리락 하는 게 좀 나아질 수 있어. 욱 하는 성격이 누그러질 수 있어. 꽁하게 곱씹고 곱씹는 성격이 펴질 수 있어.’
이 아이디어를 가슴에 넣어두세요. 그건 그냥 믿어도 아무런 해가 없는 생각입니다. 그걸 알고 믿으면 스스로 운동하면서 자기감정을 조금은 지켜보게 됩니다. 자기만 아는 내밀한 몸과 감정과의 연결 지점을 조금씩 찾아가게 될 거예요.
* 내 몸에 책임감이 생긴다
‘내 몸은 내가 고쳐가며 살겠어.’
요기들은 거의 이렇게 속으로 자신과 약속합니다. 몇 번쯤 그렇게 생각한다가 아니라 거의 내밀하게 약속까지 합니다.
왜 그럴까요?
몸을 미세하게 다루다 보면, 아무래도 좋아지기만 하지 않죠. 스스로 고통도 많이 줘요. 해서 치료를 반복하죠.
운동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병원에 더 많이 간다는 이야기를 흔히 들어보았을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그래. 뭐든 지나치면 안 돼지.’라는 교훈만 남기고 넘어간다면 한쪽 진실은 보지 못하는 거예요. 이들은 방법이 서툴거나 틀려서 탈이 났을 수 있지만, 어쨌거나 자기 몸-마음을 배우는 중이죠.
아프면서 배워요. 주식 투자자들이 숱한 실패를 통해서 주식시장을 배우는 이치와 같아요. 실패한 기록이 그다지 즐겁진 않지만, 사람은 어리석게도 아파야 배우는 부분이 있어요. 아프기 전까지는 자기가 어떤 부분을 잘못 사용하고 있는지 인지하지도 않고, 알고 있더라도 귀찮아서 고칠 노력을 하지 않아요. 그런데 아프고 나서야 정신 차리고 다시 시도해보면서 습관을 돌아보죠. 이런 일이 반복되면 자기 몸-마음에 대해 좀 더 미세하게 알게 됩니다.
몸을 이렇게 쓰니까 아프구나,
마음이 좋지 않구나 하는 것을 다소 무식한 방식으로 배우는 셈이에요.
유식하게, 좀 곱게 배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결과도 빨리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쩌면 뭔가를 익히는 건 다 무식하고 더디게 이뤄질 수밖에 없는지도 몰라요.
힐링이라는 말은 어떤 서비스를 누리는 일이라는 뉘앙스를 풍깁니다. 거기에는 소비자인 내가 비용을 내고, 치유 전문가가 고쳐준다는 인식이 있어요. 집수리하러 가서 “바닥을 뜯어내고 다시 배선을 깔아야 합니다.” 하면 값을 치르고 교체하면 되는 식으로 내 몸을 생각하기도 해요.
“치료사에게 맡기면 모든 게 해결됩니다.”처럼 든든한 말이 있을까요? 누구나 자기가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면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나 내 몸은 내가 가장 권위 있는 전문가일 수밖에 없어요. 30년 40년 동안 함께 살아온 내 몸이잖아요. 아무리 전문가라도 한두 가지 검사로 원인과 치료법을 다 알아내기는 어려워요.
물론 외상이나 질병은 당연히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질병은 신경성이나 스트레스, 면역력 저하로밖에 설명되지 않는 수많은 증상들에 관한 거예요.
만약에 몸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시작으로, 점점 내 몸에 책임감이 생겨가고 있다면 정말 좋은 변화예요. 치료기를 올리는 암 환자 유튜버들도 공통적으로 이 책임감을 강조합니다. 기본적으로 나는 나를 돌봅니다. 그런 인식이 점점 뚜렷해진다면, 소소하게 아픈 것도 보약이 됩니다. 내가 몰랐던 나를 알 새로운 기회니까요!
자기만의 경험, 그 데이터를 쌓아가세요. 해봐서 실패했던 거, 틀렸던 거, 이도 저도 아닌 거, 완전히 후회하는 거 등등이 쌓이면, 그것이 진짜 파워가 될 거예요. 절대로 성공한 경험이 하나 있다고 파워로 쓰지는 못해요.
보통 권위 있는 누군가의 신뢰할 만한 그 연구라고 하더라도 내게 잘 적용되지 않을 때가 많거든요. 결과도 잘 나지 않고 의문만 생길 수 있죠. 그 정보를 자기가 해보면서 ‘내게 완벽한 정보로 다듬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지금 운동이나 몸 관리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일과 사랑, 취미에 이르기까지 아무 거나 다 넣어도 통하는 공식이죠.
나만의 경험, 그 데이터가 쌓일수록 자기 신뢰도가 높아져요. 완벽한 정보를 찾아서 한 번의 성공을 기대하고 했다가 금세 이게 아니네 하고 관두는 게 아니라 아는 거 조금을 갖고 계속 경험하는 쪽으로 마음을 열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