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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asson Sep 25. 2023

L에게 보내는 편지

#02. 네가 나중에 커서 내 편지들을 읽어보았으면 좋겠어

2021.12.08 / 09:17 am

리나에게,



안녕 리나야.

나는 너의 '엄마'인 윤아야.

너의 이름은, Little Yuna에서 따온 Lina란다.

내 생일은 12월 9일인데,

너는 내 생일 하루 전날인 8일에 날 찾아와 줬어.

네가 세상에 나올 예정일은 원래 12월 2일이었어.

내가 너의 첫 집을 참 아늑하게 잘 지어줬나 봐.

1주일가량을 더 머무르다니.


나는 19시간 동안 진통을 했어.

자궁문이 5cm 정도 열렸을 때부터 정말 참을 수 없는,

살면서 처음 겪어본 종류의 통증이

내 아랫배를 강타하기 시작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


이 진통은 3~5분 간격으로 찾아왔는데,

진통이 다시 찾아오기까지의 그 기다림이 너무 무서워서 극도의 스트레스가 몰려오더라.

막 진통이 시작되려 하면 너의 아빠를 붙잡고 스웨덴 병원에서 한국말로 크게 소리쳤어.


살려줘! 제발! 엄마! 제발 살려주세요! 너무 아파요!


한국에 있을 네 할머니도 계속 소리치면서 불렀어.

그냥 무통주사를 놔달라고 부탁했어.

자궁문이 늦게 열릴 수도 있다 했는데,

정말 너무 아파서 그런 걸 생각해 볼 여력이 없었거든.  

그들이 너의 머리에 무슨 전선 같은 걸 연결해 놨는데,

너의 심박수를 체크할 수 있는 거래.

계속 지켜보다가 혹시라도 너의 심박수가 떨어지기 시작하면 긴급제왕절개에 들어갈 거래.


나는 한쪽 구석 소파에서 쪽잠을 청하는 너의 아빠와

삑삑거리는 장치들을 바라보며 밤을 하얗게 새웠단다.  


정말 고맙게도 너의 심박수는 너무 안정적이었어. 너무 졸리고 피곤한데 잠을 잘 수가 없었어.

너의 심박수도 내가 계속 체크를 해야 마음이 놓였고, 언제 네가 나오려고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잠을 청하는 일이라는 게 쉽지 않더라고.

다행인 건, 무통주사 덕분에 버틸 수 있었던 거야.

 나한테 진통이 오는 걸 그래프로 확인할 수 있었는데,

무통주사를 맞고 나서부터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어.

그냥 1분마다 치솟는 그래프 수치들을 바라보며

'아, 진통이 오고 있는 중이 구'를 알 뿐이었어.


우리 엄마,

그러니까 네 할머니가 나를 낳을 때에는 무통주사가 없었대.

새삼 엄마들을 대단하다고 느껴지던 새벽이었어.

정말 뼈가 뒤틀리고 장기가 요동치고 겪어본 적 없는 종류의 고통들이 해일처럼 밀려오는데,

몇 시간 뒤면 널 볼 수 있다는 설렘에 긴장되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했거든.

너희 할머니도 그랬겠지?

그 어린 나이에 임신을 하고 나를 낳는데,

얼마나 무섭고 아팠을까?

그렇게 태어난 내가 어느새 나이를 먹고 반려자를 찾아서 아이를 갖고 새로운 가정을 시작하려 하다니.


따위의 감상들과 부풀어 오르는 기대들,

그리고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울컥울컥 목구멍 너머로 올라와서 숨죽여 울었어.

19시간을 넘게 너를 기다리던 스톡홀름의 한 산부인과 출산실
잠시 눈을 붙인 네 아빠
내 상태와 네 상태를 체크하던 기계들


너는 4.1kg이라는 어마어마한 몸무게로 내 자궁문과 산도를 통과해 세상 밖으로 나왔단다.

무려 자연분만으로 말이야.


너의 머리가 보인다고 만져보라며 내 손을 잡아 너의 머리를 만져보게 했던 조산사가 떠올라.

무통주사가 다 끝나서 생으로 진통이 다 느껴지는 와중에 나는 엄청나게 힘을 주고 있는데 말이야.

그래도 너무 신기했어.

너의 머리가 나왔다니?

20분 정도 힘을 준거 같아.

나는 탈진해서 더 이상 힘을 못주겠다고 말했어.

그랬더니 진공흡입기(?) 같은 걸 가져오더라.

너의 머리에 연결해서 너를 밖으로 빼낼 수 있대.

그 와중에 나는 이걸 하면 네가 아플 수도 있냐고 물어봤었어.

아플 수도 있지만 너는 기억 못 할 거라고 괜찮다고 말하는 의사 선생님에게

나는, 싫다고- 더 힘주겠다고.

결국 있는 힘껏 힘을 줘서 네가 나온 거야.


너를 내 뱃속에서 키워나가며 함께 했던 10개월간의 여정이 이렇게 끝이 나고

이제 드디어 너를 내 품 안에 안을 수 있게 된 거지.

정말 갓 태어난 너


너는 정말 미지근하고 미끄덩하고 양수에 퉁퉁 불어서 못생겼었어.

근데 더 잊을 수 없는 건, 바로 네 아빠의 울음소리야.


네가 나와서 내 품에 안기는데,

내 머리맡에서 힉힉힉힉힉- 거리는 이상한 소리가 들리더라고.

옆을 봤는데 너의 아빠가 눈시울이 붉어져서는 폭발하는 감정과 감동을 차마 주체 못 한 이상한 울음소리를 내고 있더라.

나는 만신창이처럼 너덜너덜한 상태였지만 너의 아빠의 그 모습이 너무 웃기고 귀엽다는 건 느낄 수 있었어.

떨리는 손으로 탯줄을 자르더라.

그 떨리는 손이 마치 나한테 프러포즈하던 날 떨리던 손처럼 형편없게 달달달 떨리더라고.

그래도 그 모습이 참 귀엽고 사랑스러웠어.

 

너는 내 품에 안기더니 배가 고팠는지 아니면 본능인 건지,

내 젖가슴을 찾더니 세차게 물고 빨더라고.

너무 신비롭고 경이로웠어.

내 뱃속에서 나온 생명체라니.

내 피, 살, 그리고 나와 내 남편의 유전자가 합쳐져 만들어진 생명체라니.

내가 이 생명체의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니.

내가 엄마라니..


이 아름다운 세상에 내놓은 거라고는 이산화탄소나 쓰레기밖에 없었는데,

오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경이로운 생명체를 세상에 내놓았다니.


그렇게 엄청난 탈력감으로 기진맥진해 있는 와중에도 배가 고프더라.

19시간 동안 초코바 하나랑 과일주스 말고는 먹은 게 없었거든.

한 팔에 너를 안고, 너를 한없이 바라보며 병원에서 준비해 준 스웨덴식 축하샌드위치를 맛있게 먹었어.

그 와중에도 내 식욕은 왕성하더라고.


지금도 가끔 생각나서 해 먹는 스웨덴식 오픈샌드위치



네 할머니가, 방금 애 낳은 산모한테 이런 걸 음식이라고 주냐고 한차례 분통을 터트렸지만,

내 입에는 그 어떤 미슐랭 음식점의 음식보다도 맛있었어.



리나야,


너는 내 생일 하루 전날,

내 생일 선물처럼 나에게 찾아왔어.

내 인생 최고의 선물이자 기적이자 업적처럼 말이야.

네가 살면서 어떤 시련을 겪던, 너는 나의 최고의 업적이라는 것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네가 나중에 커서 성공을 하던 실패를 하던,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아.

너는 존재 그 자체로 나에겐 더할 나위 없이 성공적이거든.


네 할머니 할아버지가 늘 나에게 했던 말이야.

내가 나중에 사회에 나가 개털이 되어도,

그들은 늘 내 편이 되어줄 것이고

내가 가진 게 쥐뿔도 없게 되어도,

그들은 평생을 걸고 날 책임지겠다고 했어.

그러니 내가 무조건적으로 행복하게 살기만을 바란다 했어.

그 마음이 무슨 마음인지 이제 조금씩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아.


너는 내가 내 인생과 목숨을 걸고 끝까지 책임질 테니 걱정 말고 네 꿈을 마음껏 펼치렴.

나는 언제나 네 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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