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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asson Sep 25. 2023

L에게 보내는 편지

#01. 태명, 슈베(슈퍼베이비)

2021.07.21

슈베에게, 

네가 18살에 읽어보길 바라며 네게 편지를 쓰고 있다. 


안녕? 

나는 지금 한국이야. 너도 같이 온 거지. 

지독했던 입덧은 16주 차 정도가 지나니까 하루아침에 거짓말처럼 사라졌어. 

다시 태어난 느낌이었달까? 자고 일어났는데, 몸이 너무 가볍고, 머리가 맑고, 기분이 상쾌해서 너무 놀랐어. 혹시 너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지 순간 너무 걱정되더라. 

그 정도로 한순간에 몸이 가벼워졌다고 느꼈거든. 


몇 걸음만 걸어도 숨이 차고, 뭘 먹어도 속이 안 좋고, 깨질 것 같던 무근본 편두통, 

그리고 세상에 모든 냄새가 날 괴롭히던 지난날들이 

마치 옛날 옛적 이야기처럼 아득하게 느껴졌어. 


마침 나는 너무 간절했던 한국행을 눈앞에 두고 있기도 했었지. 

입덧 때 너무 먹고 싶었던 새콤달콤 시원한 냉면과 그 흔한 아이셔캔디가 너무 먹고 싶어서 

한국을 가야만 했었어. 스웨덴에서 찾을 수가 없었거든. 

안타깝게도 스톡홀름에는 그 흔한 냉면 파는 곳조차 없었어. 


공교롭게도 한국행을 얼마 안 남겼을 때, 내 지옥 같던 입덧이 사라진 거야. 





그전에 말이야,

너에게 말해두고 싶은 게 하나 있어. 


지금은 팬데믹이라고 해서 전 세계 전례 없는 신종 역병이 창궐하여 하늘길도 뱃길도 다 막힌 상황이란다. 

물론 다 막힌 건 아니야. 근데 극심했을 때에는 정말 다 막혔었어. 

21세기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 그 누가 상상해 봤겠어? 

늘 복작이던 공항은 마치 아포칼립스 영화의 한 장면처럼 텅 비어있고, 

큰 비행기에는 소수의 사람들만 탑승한 체 제한적으로 열려있는 국경을, 엄격한 규정들과 함께 넘나들고 있단다. 나는 페이스실드와 마스크를 쓰고 비행을 했어. 그게 규정이었거든.

안 그래도 답답하고 건조한 기내인데, 페이스실드에 마스크까지 쓰고 있자니 너무 힘들더라. 

그래도 꾀부리지 않았어. 

혹시 내가 꾀부렸다가 전염병에 걸리면 내가 너를 무슨 면목으로 보겠어. 

너한테도 고스란히 전해질텐데. 

이렇게 비행기를 탔어야 했어.

그게 끝이 아니야.

한국은, 입국하면 무조건 2주간의 자가격리를 시행해야 했어. 

나는 네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서 내 방 문을 걸어 잠그고 죄수처럼 네 할머니가 배급(?)해주던 음식을 먹으며 2주를 버텨야 했어. 그랬는데도 참 행복하더라. 다니던 회사도 어차피 팬데믹동안 100% 재택근무기 때문에, 상사의 허락을 받고 한국에서 원격재택근무를 할 수 있게 해 준 상태야. 


내 방에 격리되어 바라본 바깥 풍경

네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서, 내 엄마의 음식을 먹고, 핸드폰으로 네 아빠와, 내 친구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그저 누워서 시간을 보냈더니 2주가 쏜살같이 지나갔어. 





하루하루가 너무 행복했어.

먹고 싶었던 한국음식을 잔뜩 먹고, 첫 손주가 생겼다는 말에 그 누구보다도 신난 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몸에 좋다는 건 다 챙겨 먹이고, 좋은 곳에 데려가서 힐링도 시켜줬거든. 

네 이모할머니들도 지금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단다. 

집안에 첫 손주다 보니, 다들 너무 기대되나 봐. 

에어컨 안 틀기로 유명한 네 할머니가 내가 덥다고 하니까 하루종일 틀어주더라고. 

내 친구들도 임신한 나를 엄청 배려해 줬어. 나 괜히 멀리 나오지 말라고 다들 우리 동네까지 직접 와주고 선물도 챙겨주고 너의 안부도 물어봐줬거든. 


너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어. 

나는 문득 내 인생에 감사하기 시작했어. 

그래도 내가 인생을 허투루 살진 않았구나. 

너라는 존재가 아직 세상밖에 나오지도 않았는데, 

너를 향해 쏟아지는 축하와 축복, 너의 온전함과 건강을 바라는 작고 소중한 마음들을 

기꺼이 내줄 수 있는 사람들이 내 주위에 이렇게나 많았구나- 싶더라고. 

네 할머니 말에 따르면, 나도 첫 손주여서 이쁨과 사랑을 독차지했었대. 

네 할아버지 쪽에서는 내가 첫 손주는 아니었지만 첫 친손녀딸이었거든. 

손자들만 보시다가 손녀딸이 태어나서 네 증조할아버지가 날 그렇게 어화둥둥 하셨다더라. 



그건 그렇고, 바로 오늘 말이야.  

정밀초음파로 너를 세세하게 관찰할 수 있었어. 

이제 제법 사람의 모습을 갖춘 너의 몸이 보였어. 

선생님이 너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세어 주셨어. 

(아, 아마 그때부터 시작된 거 같아, 너의 손과 발에 내가 중독된 게)

손가락 각각 5개씩 10개. 발가락도 각각 5개씩 10개. 

좌뇌 우뇌도 정상이었고, 심장 혈류도 잘 흐르고 있었고, 

너의 장기들도 대부분 다 생겨서 제 역할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어.

너의 볼록한 배 옆모습도 보였고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두개골도 보였단다. 

모든 게 정상이래. 너무 기쁘더라. 

너의 이마, 코, 입
입체초음파



네가 막 생겼을 때에는 아직 뭣도 모르고 감도 안 잡혔던 터라  

'아, 이 아이가 천재로 태어났으면 좋겠다~' 

'아, 이 아이가 완전 미인으로 태어나서 나중에 할리우드 배우 했으면 좋겠다~' 

등등의 진담반 농담반 우스갯소리를 네 아빠와 주고받고는 했는데, 

점점 내 뱃속에서 사람의 모습으로 커가는 너를 인지하고 나서부터는 

그런 천하태평 철없이 배부른 소리따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더라. 




'다 필요 없고, 아무 이상 없이 무조건 건강하기만 해라' 




나머진 나랑 네 아빠가 다 해줄 테니 말이야. 

그게 우리가 너에게 바라는 유일한 바람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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