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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asson Oct 11. 2023

L에게 쓰는 편지

#05. 스웨덴 교회에서 올린 만삭의 결혼식 (그리고 베이비샤워)

2023.10

리나에게,



리나야,

곧 있으면 나랑 네 아빠의 결혼기념일이란다.

너한테 꼭 알려주고 싶은 게 있어서 이렇게 편지를 써봐.


나랑 네 아빠는 스웨덴에 삼보 비자(파트너 비자)를 신청하고 기약 없는 기다림의 장거리 연애를 시작했어.

스웨덴 삼보 비자는 끝없는 기다림으로 악명이 높거든.  

하필 엎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어서 더욱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었어.

지금까지 어디서든 비행기 타고 만났었는데 하늘길이 모두 막혀버린 우리에게 만날 수 있는 곳은 없었거든.

신청하고 약 13개월이 지났을 때에 기적처럼 승인이 났어.

나는 텅 빈 비행기를 타고 스웨덴으로 입국했어.


네 아빠가 계획했던 토스카니 고성에서의 프러포즈도 다 취소되고

우리는 일단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팬데믹 속 동거를 시작했단다.

프러포즈와 결혼식 모두 이 난리가 잠잠해지고 국경 문이 자유롭게 열렸을 때 하기로 미뤄두고 말이야.

나는 운 좋게 스톡홀름에서 직장도 바로 구하고 새로운 사회에 적응할 준비를 했었단다.


그런데 말이야-

2021년 4월 1일 만우절날,

거짓말처럼 네 소식을 알게 되었어.

우리는 테스트기 3개를 사서 확인하고 또 확인할 정도로 믿을 수 없었어.

나는 이제 막 직장을 구해서 다니고 있었고, 아직 멋진 프러포즈도 결혼식도 못 올렸는데,

그럴 만한 행동을 한 적이 없는데 네가 생겨버렸거든.

아직도 믿을 수가 없어서 나는 그저 울었던 거 같아.

그 당시 나는 아기를 가질 계획이 전혀 없었거든.

이제 막 스웨덴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땅에 도착해 이 사회에 적응해야 했고

연애만 하던 나와 네 아빠의 같이 살면서부터 시작된 갈등 조율도 필요한 상태였고

팬데믹이라 전 세계가 어수선하던 상황이었으니까.


네 아빠랑 몇 날 며칠을 고심하고 상의했단다.

우리가 부모가 될 준비가 되었는지, 태어날 이 아이의 인생을 책임질 준비가 되었는지 따위를 말이야.


고민해 봤자였어.

우리가 초음파를 통해 너를 처음 본 순간 이미 너와 사랑에 빠졌거든.

(네 아빠는 울었어)

너는 거짓말처럼 찾아온 게 아니라 기적처럼 우리 인생에 찾아온 거야.  

우리는 네 태명을 슈퍼베이비, 줄여서 슈베로 정했어.

엄청난 확률을 뚫고(?) 생겨난 너이기 때문에.


네 아빠는 마음이 분주해졌단다.

나에게 아직 멋진 프러포즈도 못했는데 곧 있으면 아빠가 되니까.

그는 결국 내게 프러포즈했고, 이 이야기는 나중에 가볍게 지나가는 식으로 말해줄게.


결혼식은 네가 태어난 뒤에 정식으로 하고 싶었지만

한국에 출생신고를 하려면 나랑 네 아빠가 한국에 혼인신고를 먼저 해야 한다더라.

안 그러면 너는 한국 할아버지 밑으로 들어가게 된대.

그래서 우선 혼인신고를 하려고 했는데 이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더라.


스웨덴에서 먼저 하고 그다음 한국에 해야 하는데,

스웨덴에서 혼인신고 하려면 시청에 가서 간단한 서약 같은 걸 하고 증인을 2명 이상 불러야 했어.

사람 욕심이라는 게,

2명을 누굴 부를 것인지 논의하다가 결국 시가족들,

그러니까 네 아빠 가족들을 다 부르는 게 낫지 않겠냐는 결론이 났어.

물론 한국 가족들은 못 왔지만 말이야.

시간이 없어서 결혼식 준비는 딱 2주 정도밖에 못했어.

12월 2일이 예정일인데, 11월은 너무 만 삭일 거고 10월에 해야만 했거든.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집 근처 작은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단다.

시가족과 스웨덴에서 사귀게 된 친구들 몇 명만 불러서 약 20~30명 정도의 하객과 함께.

내 다른 친구들은 전부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온라인 참석했었어.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여러모로 잊지 못할 결혼식이었어.

메이크업, 헤어? 물론 내가 했고 부케와 드레스도 빛의 속도로 어디선가 사 왔단다.


내 뱃속에, 너 있다..
모든 걸 영어로 진행해 주신 쿨하고 재미난 목사님, 그리고 저기 확연히 보이는 너의 존재감
지금 보니 참 마음에 드는 가을색의 부케
뱃속에 네가 증인이 되어준 우리의 특별한 결혼식
지금 보니 참 살이 많이 쪄있었구나 싶은 나의 만삭 결혼식



예정일 근 한 달 전이라 몸이 많이 무겁던 만삭 시절.

얼굴과 발과 손이 퉁퉁 부어 뭘 해도 퉁퉁 부어있던 시절.

뱃속에 네가 가장 가까운 증인이 되어준 우리의 스웨덴 결혼식.


결혼식이 끝나고 시어머니가 (네 스웨덴 할머니) 날 당신 집으로 데리고 가셨어.

나는 아무 의심 없이 피로연이 생략된 대신 다 같이 Fika 하려나보다- 하고 따라갔어.

(*Fika: 스웨덴의 티타임)


그리고,

네 스웨덴 할머니 집에 들어선 순간 나는 엉엉 울어버렸어.


네 아빠 집안 3대째 사용하는 갓난아이 요람 속에 가득 들은 선물들
날 위해 시가족들이 전 날부터 열심히 준비한 베이비샤워 파티
스웨덴 할머니 거실을 장식하고 있는 각종 네 용품들


내 시가족, 그러니까 네 아빠의 친할머니, 외할머니, 작은엄마, 이모들, 동생들이

전 날부터 열심히 준비한 내 베이비샤워 파티가 날 기다리고 있었거든.


한국에 있는 내 가족들과 친구들이

베이비 샤워 또는 브라이덜 샤워 못 챙겨준다고 되게 미안해했는데

시가족들이 이렇게 준비해 주셨더라.

정말 많이 울었어.



쉿! 이건 비밀인데,
네 아빠가 미워도 네 아빠 가족들 때문에 용서될 때도 있어.
네 아빠 가족들은 무조건 내 편을 들어주시거든.








그리고 1년 뒤 2022년 7월,



우리는 한국에서 결혼식을 한번 더 올리는데 그때에도 너와 함께 했었단다.

물론 그때 너는 세상밖에 나와서 인생 8개월 차를 살고 있었을 때였고.

두 번이나 올린 우리 결혼식에 두 번이나 참석한 너
결혼식 내내 한 번도 울지 않았던 대견한 너
우리 포토그래퍼님이 너한테 반해서 너 사진을 참 많이 찍어주셨어
이런 보너스샷도 찍어주셨더라



스웨덴, 한국-

두 번의 결혼식에 두 번 다 참석한 우리 딸 리나야.

네가 우리 인생에 찾아와 줘서 너무 고맙고 행복하다.



우리 잘 살아보자.

우리의 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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