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unasson Mar 05. 2024

L에게 보내는 편지

#10 한국어 폭발, 스웨덴어 소멸

2024.03.01

리나에게


안녕 리나야.

한동안 편지가 뜸했어.


꽤 큰 일들이 있었거든.


지난 1월 초에는 네 할머니가 몰타에 놀러 왔었어.

내가 입덧이 너무 심해서 날 도와주러 한국에서 먼 길 오신 거야.

응, 나는 지금 임신 중이란다.

즉, 리나 네게 곧 동생이 생길 거라는 뜻이지.


입덧이 여전히 심해서 할머니 한국 갈 때, 너랑 나도 같이 갔어.

한국에서 약 한 달을 머물다 얼마 전에 몰타에 다시 돌아왔단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입덧이 없고 더할 나위 없이 최상의 컨디션이야.

그래서 다시 너에게 편지를 쓰고 있지.


요 몇 달간 너에겐 조금의 변화가 있었어.  

두 살 인생, 이제 비행기 타는데 이골이 난 너




첫 번째,

떼를 쓰는 게 아주 심해졌다는 것.

이렇게 떼를 써도 되나 싶을 정도로 부쩍 심해졌단다.

무조건 '싫어!'라고 하고 무조건 '내 거야!'라고 말하기 시작했지.

마음에 안 들어서 짜증이 나거나 피곤하면 아무 곳에서나 드러눕더라.

특히 너는 피곤하면 주체를 못 하고 짜증과 억지를 심하게 부렸지.

이번에 너랑 둘이 임신한 몸을 이끌고

한국에서 몰타로 돌아오는 17시간의 비행을 했는데

짐은 무겁고, 배도 무겁고, 너는 피곤한지 심하게 짜증을 부렸고

공항 바닥에 드러누워서 울더라고.

정말 얼마나 식은땀이 나고 절망적이었는지.

지금에서야 웃으며 말 하지만, 정말 너무 힘들었단다.


처음엔 단호하게 하지 마라 말하는데

나도 사람인지라 정말 화가 났어.

너무 화가 나서 크게 소리치며 혼내고 싶었어.

가끔은 나 몰라라 도망가고 싶은 적도 많았고

미안하지만 엉덩이를 세게 때려주고 싶을 때도 있었어.


머리로는 널 이해하려고 하는데

주체할 수 없는 화가 나를 제일 힘들게 했던 것 같아.

너는 지금 많은 것을 새로 경험하고 습득하며 새로운 감정을 느끼는 중인데,

그게 너한테 당연히 힘들고 압도적이라는 것을 아니까

내가 널 이해해줘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 말이야.

내 화를 컨트롤하지 못한 채,

너를 감정적으로 훈육하게 되는 나 자신이 너무 싫었어.

내가 만약 조금 더 현명하고 더욱 좋은 엄마였다면

새로 배우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부유하는 너를

더욱 올바른 길로 이끌어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참 괴롭더라.


너한테 소리를 지를 수 없으니

나는 그냥 화난 표정으로 너를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어.

너는 실컷 울다가 지칠 때 즈음 나에게 다가왔어.

나에게 안아달라고 팔을 벌리지.

그리고 나에게 안겨서 '엄마 미안'이라고 말해.


아... 너같이 착한 딸을 내가 무슨 자격으로 키울 수 있을까.



두 번째,

감정을 말할 줄 안다는 것.

기쁘다, 좋다, 행복하다, 화나다, 슬프다, 무섭다, 재밌다.


감정을 말하는 너를 보면 그렇게 신기하고 기특하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어.

'리나 햅삐(happy), 엄마 햅삐'라고 말하며 사랑스럽게 웃는 너.

한 껏 떼 부리고 실컷 울고 나한테 안기면서 '리나 화나'라고 말하는 너.

아기상어 핼러윈 영상에 나오는 드라큘라 백작이나 악어를 보고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리나 무셔(무서워)!'라고 말하는 너.

네 아빠랑 한 달 동안 떨어져 있을 때, 아빠랑 영상통화를 하거나 아빠 사진을 보면서

눈을 초승달처럼 휘며 '아빠 조타!(좋다)'라고 말하는 너.


네가 앞으로 살면서 얼마나 더 많은 감정들을 배우게 될지

기대가 되면서 걱정도 되고 그렇단다.

가끔 어떤 감정은 네가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너를 심연 속으로 빠트릴 테니까 말이야.

늘 하는 말이지만,

네 뒤에는 너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으니 걱정 말고 느껴보고 부딪혀보렴.

마음껏 사랑하고, 마음껏 행복하고, 마음껏 슬퍼하고, 마음껏 좌절해 보고, 마음껏 실망해 보렴.

그게 너의 감성을 완성시키는 자양분이 될 테니까.



세 번째,

한국말을 부쩍 잘하게 되었고 꽤 능숙하게 이어 말하기 시작했어.

한국어, 스웨덴어, 영어에 노출되어 있는 너는 말이 조금 느린 편이야.

그럴 만도 하지. 나는 한국어, 아빠는 스웨덴어,

어린이집에서는 영어를 쓰니까 얼마나 헷갈릴까.

두 살이 넘어가도 아직 그 어떤 언어도 제대로 하지 못해서 가끔 초조하기도 해.

다중언어 아이들은 말이 늦다고 하고,

네가 알아듣는 데에는 문제가 없으니 조급해하지 않으려고.


그런데 이번에 한국에 한 달을 머무는 동안,

네 한국어가 엄청나게 늘었단다.

한국 도착하기 전까지 할머니, 할아버지를 말하지 못했던 너인데 한국 도착한 지 이틀 만에

갑자기 '함머니', '하부지'라고 말하더라고.


네 할머니, 할아버지가 얼마나 기뻐했는 줄 아니?

특히 할아버지가 제일 행복해했어.

네가 할머니는 줄곧 '모모'라고 부르긴 했었거든.

할아버지는 전혀 부를 줄을 몰랐어서 엄청 기대하셨거든.


할아버지가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시면

네가 '하부지!!'라고 소리 지르며 중문으로 뛰어갔어.

네가 세상 그 무엇보다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미소를 얼굴에 지고

중문에서 팔짝팔짝 뛰며 당신을 마중 나온 모습을 보는 게

세상에서 제일 행복했대.


가끔 깜짝 놀랄 정도로 한국어를 하는 너.

나는 너무 기뻤어.


그런데 네 아빠는 반대로 슬퍼했어.

우리가 다시 몰타로 돌아왔을 때, 네가 스웨덴어를 전혀 하지 않았거든.

한 달 동안 모든 스웨덴어를 잊은 것처럼 행동했어.

네 아빠가 무척 슬퍼했는데, 사실 나는 예상했던 바였지.


네 아빠는 말수가 그렇게 많지 않거든.

그리고 너랑 하루종일 붙어 있는 게 아니니까

스웨덴어에 노출될 기회가 많이 없는 거잖아.

네 아빠는 조금 더 분발해야 해.

내가 얼마나 네 언어를 위해서 끊임없이 말을 하는데.

나 정도 노력은 하고 슬퍼해야지. 안 그래?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때의 너는 과연 어떤 언어를 잘하고 있을까?

물론 이 글을 읽을 정도면 네 한국어가 수준급이란 뜻이겠지.

내가 정말 최선을 다할게. 네가 한국어를 잘할 수 있도록 말이야.


리나 너랑 네 동생이 꼭 한국어를 잘할 수 있도록 내가 노력할게.


작가의 이전글 L에게 보내는 편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