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보고 온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더 퍼스트 슬램덩크"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몇 번이고 생각했는데 손가락이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 무게가 가볍지 않아서였을까. 원작자가 직접 각본과 연출에 참여해 무수히 많은 리터치를 거쳤다고 들었는데 확실히 그런 티도 많이 난다, 걸작이다. 두 번 정도 눈물을 참았고 한 번 결국 줄줄 울었다. 이 영화가 왜 좋았을까. 정리해본다. 참고로 더빙판을 보았고, 왓챠피디아에 남긴 별점은 ★★★★★, 별이 다섯 개! (이하, 다 아는 내용이겠지만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애니메이션이라기 보다는 "만화영화"라고 하고싶다. 영화의 오프닝 장면에서부터 등장인물들은 흑백의 스케치로 한명씩 걸어나온다. 이는 나와 같은 30대(후반이긴 하지만)나 40대에게 종이 만화책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연출이며 원작자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스케치에 의해 이 장대한 드라마가 그려졌었다는걸 다시 되새길 수 있었다. (독서실에 도착하자마자 만화방에서 빌려 온 만화책을 책장에 꽉꽉 채워놓고 인생 공부를 시작하던 그 때가 생각나네.) 그럼에도 2D 만화의 질감을 사용한 3D CG 애니메이션 기법을 사용해 전혀 어색하지 않고 리얼하다.
마지막 하이라이트 장면은 더 천천히 말하고 싶었는데, 그 장면 또한 만화책을 넘기는 듯한 슬로우 모션으로 표현했다. 그런 연출을 위해서인지 무음이다. 그래서 "왼손은 거들 뿐."이라는 강백호의 명대사 또한 성우의 음성이 아닌 관객 개개인의 마음의 소리로 듣고, 외쳤을 것이다. 그 숨막히는 순간에 같이 호흡을 참고 함께 감정을 끌어올렸던 동지들, 1.7(토) 판교CGV 7관 오전 10시50분 관객들에게 심심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2. 다루지 않았던 이야기가 아는 이야기와 함께 나온다. 이 영화는 슬램덩크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산왕전이 큰 줄기이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우리가 알지 못했던 송태섭의 가족 이야기가 나온다.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피어스(Pierce)>라는 제목의 단편을 내서 송태섭과 이한나의 첫 만남에 대해 그린 적 있는데, 그 배경이 되는 오키나와(아마도?)에서 있었던 송태섭의 슬픈 유년기를 보여준다. 집안의 주장과도 같았던 형의 존재를 이어 받고 싶으면서도 뛰어 넘고 싶고 그러기엔 농구선수에게 주요한 피지컬인 키가 되지 않았던 우리의 가드, 송태섭. 그리고 현재 시점 산왕전을 겪어가며 봉합되는 가족의 이야기까지. 이노우에가 아마 제일 좋아하는 포지션이 가드라든지, 그간 아픈 손가락처럼 데려간 캐릭터가 송태섭이라든지 뭔가 생각하는 바가 분명했던 것 같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라는 제목에 걸맞게 농구의 첫번째 포지션인 포인트 가드 송태섭이 다루어 졌다면, 세컨드 써드에 이어 한 다섯 편은 나왔으면 좋겠다고 초긍정 희망회로를 돌려본다.
3. 그럼에도 나를 눈물 짓게 한 것은 송태섭 가족의 극! 복! 이야기가 아닌 산왕전 그 자체였다. 갑자기 관객을 향해 난동 부리듯 북산을 응원하라는 이상한 강백호. 그렇게 큰 소리를 쳐놨으니 이제 이길 수 밖에 없지 않겠냐고, 뭐라도 보여줘야 한다고 한다. 요즘 시대에 저런 사람이 어딨어. 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러니 만화고 영화겠지. 그래도 이 정도 감동에 눈물은 참을 수 있었다.
다음 고비는 송태섭. 하나만 넣자, 일 점만 내자. 송태섭은 정대만 일행에게 옥상에 끌려왔을 때처럼 두려움에 오른손이 떨릴 때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오히려 더 쎈 척을 한다. 하지만 코트 위에서는 오히려 손바닥을 펴서 한나 버프를 확인한다. 산왕의 프레싱에 고군분투 할 때도, 산왕에게 20점차로 끌려갈 때도, 송태섭은 오히려 더 쎈 척을 하며 결국 쎄지고야 만다. 어수선한 경기의 분위기에서 호흡을 다시 북산으로 가져오는 것도, 중요한 순간 팀원들에게 작전을 지시하여 채치수를 깜짝 놀라게 한 것도 우리의 NO.1 가드, 2학년 송태섭. 우리도 두려움에 잡아 먹일 뻔한 순간, 오히려 더 담대해져 위기를 극복한 순간이 있을 것이다. 20점 차이를 뒤집을 수 있는건 한꺼번에 나오는 20점이 아니라 한 점씩 두 점씩 쌓이는 기세의 변화일테니. 여기가 두번째 눈물 고비였다.
앞서 말한 만화책이 넘어가는 듯한 하이라이트 장면은 천재인가-싶은 강백호가 해내는 역전의 순간이자, 이 영화에서 무음의 순간들이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 라이벌... 이라기 보다는 앙숙인가? 서태웅과 강백호의 하이파이브 장면. 어릴 적 보던 만화책의 카타르시스와 향수가 되살아 나는 것인지, 뜨거운 가슴을 울리는 언더독의 역전 스토리 덕분인지, 2시간 가까이 진행되던 서사의 종결에서 오는 도파민 덕분인지, 안 울 수가 없었다. 내 옆자리에 혼자 온 사내도 안경 밑으로 눈물을 닦고,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비록 박상민 아저씨의 목소리로 "뜨거운 코트를 가르며~"는 나오지 않았지만, 일본 밴드 텐피트(10-FEET)가 부른 "제ZERO감"도 이 영화에 한 몫 했다. 거기에 농구공 튕기는 소리, 코트에서 삐걱대는 농구화 소리, 둥 둥 울리는 OST가 사나이 가슴을 울린다, 여자들도 울린다. 중꺾마 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 모두 가슴 속에 뜨거운 무언가 하나는 품고 있기에, 이 작품이 관객들의 심금을 울리나 보다.
이런 작품을 아는 세대라 너무 감사하다. 영감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는지 모르겠고, 강백호는 산왕전 당시 지금이라 그랬다. 2023년, 난 이 작품과 함께할 수 있어 정말 영광의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