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배사
청바지, 청춘은 바로 지금부터, 뭐 이런거?
우리회사의 업태는 제조업이다. 30대 중후반의 나보다 10살 정도 더 많은 회사니 꽤 오래된 기업이라 할 수 있고, 그만큼 나이테처럼 두꺼워진 전통에 강한 편. 바로 이 자리에서 생각해내도 쓸데없이 써내려 오던 보고서, 조직간 장벽, 좀처럼 변하지 않는 조직문화와 같은 단점들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제일 부담스러운 것은 바로 회식자리 "건배사".
전대미문의 전염병으로 인한 팬더믹으로 회식이 많이 줄었다가, 다시 살아나고 있는 추세이다. 게다가 팀 특성상 외부인과의 미팅이나 회식도 많다. 팬더믹 덕에 토 나올 것 같은 잔 돌리기 문화는 사라졌지만, 우리 팀은 아직 건배사가 활개친다.
1~2분 상당의 개인적인 소회와 감상, 그리고 선창에 후창, 가끔은 삼행시나 노래까지 곁들여서. 여간 스트레스 받는 일이 아니지만 건배사를 유독 많이 하는 이 팀으로 옮긴지도 어인 5년차. 이제 저녁자리가 있으면 전날 저녁부터 할 말과 건배사를 생각한다. 최근에 있었던 팀/개인의 대소사, 좋았던 일, 소회를 느낄만한 아주 작은 일이라도! 그리고는 그 소회와 어울릴만한 건배사까지. 두뇌 풀가동.. 으.. 금융치료 절실한 부분.
지난 주 팀 송년회때는 준비해 간 두 번의 건배사 외에도 추가로 두 번 더 했다. 건배사 요청에 "제가요? 왜요?" 정도로 MZ스럽게 답하고 싶었지만 아직까지 남은 회사 생활이 너무 길고 탈출구는 없다. (게다가 MZ 치고는 너무 H.O.T나 젝스키스 세대다. 그들은 건배사 많이 했을까? 강타 정도는 SM사외이사도 했고..)
고역스럽긴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고 적당히 분위기를 띄우는 용도로는 좋다. 건배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간 있었던 회사나 개인 일을 반추해보고 적절한 교훈을 찾는 것도 꽤 좋은 효용이다. 건배사를 빌려 상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앞으로 어떤 것을 원하는지 듣는 것도 내가 집중력만 남아있다면 꽤 기억에 남는다. 기왕 그렇다면 주로 좋은 점만 생각하고 강화하는게 인생에 유익하지 않을까, 라고 위로해본다.
그래도 네 번은 좀 심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