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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몬트 Dec 27. 2022

어묵볶음의 물리학

“내는 어묵볶음에 물리뿟다"


  어머니는 중고등학생 시절 누나와 나의 도시락 반찬으로 좀처럼 어묵볶음을 해주지 않으셨다 볶음이 들어가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김치나 채 썬 감자가 볶아져 있었고 도시락통을 열 때부터 찐한 케찹 향기가 나는 날에는 기분 좋게도 문어 모양을 한 소세지가 야채와 함께 볶아져 있었다.


  도합 6 년으로 끝나리라 생각했던 중고교생활은 나의 쓸데없는 끈기로 인해 1 년 더 연장되었고, 재수생활을 하면서는 점심 저녁을 재수학원 식당에서 먹었다. 종종 학원 길건너 햄버거 가게에 가서 기름칠을 하거나 횟집에서 점심 특선메뉴로 팔던 돈까스를 먹으러 나가기도 하였다. 정작 그 횟집에서 회를 먹은 적은 없었지만 돈까스를 시키면 계란찜과 꽁치구이도 나오던 특이한 집이었는데 아무튼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재수 때 이후로 더 이상 어머니가 싸 주시는 도시락을 먹을 일이 없어졌단 말이다.


  재수생활을 하던 2005 년 여름 어느 날, 외할머니께서 노환으로 돌아가셨다. 요즘으로 치면 아직 정정하실 나이였지만 젊은 시절 고생을 많이 하셨던 당신께서는 여든을 갓 넘기시곤 하늘나라로 가셨다. 꼴에 재수생이랍시고 3 일 기간 중 하루 밖에 외할머니 가시는 길을 지키지 못한 것은 아직까지 가슴 한 켠에 묵직한 부분으로 남아있지만, 외할머니는 가시면서도 손주를 위해 기도해 주셨는지 다음해 봄 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떠났다.


  망나니 같던 신입생 시절을 보내고, 다음해부터 군복무를 하였고 복학해서 또 거들먹대다 보니 정신없이 나의 20 대 초중 반시절이 지나가 있었다. 내가 스물일곱 즈음이었을 것이다. 나는 슬슬 취업준비를 하고 있었고, 누나는 슬슬 결혼을 위해 이사람 저사람 부지런히 만나보던 시절이었으리라. (매형 죄송해요.) 나는 방학이었고 누나도 때 마침 고향에 내려와 간만에 부모님과 네 식구가 모인 날이었는데 상을 가득 채운 반찬 중에 이게 왠일 통깨가 솔솔 뿌려진 어묵 볶음이 있었다.


  분명 내 기억속의 어머니는 경상도 사투리로 "어묵 볶음에 물리뿟다." 라고 하셨었는데. ('물리다'는 다시 대하기 싫을 만큼 몹시 싫증이 난 상태를 뜻하는데) 어쩐 일로 어묵 볶음을 하셨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요즘 들어 외할머니 생각이 나서 어묵볶음을 했다고 하셨다. “보고싶으시구나.” 하며 위로의 말을 건낼 법도 한데 괜시리 어묵볶음만 열심히 퍼 먹었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가 어릴 적 외할머니는 시장에서 어묵을 파셨다. 자연스레 어머니의 주식은 어묵볶음. 물릴 만도 하지. 게다가 요즘 세상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외할아버지는 어머니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기집애가 무슨 공부냐고 따라다니며 훼방을 놓으셨고 어머니는 외할머니가 해놓고 나가신 차가운 어묵볶음만을 반찬으로 먹으며 부엌에서 몰래 공부하셨다고 한다. 정말이지 물릴 만도 하다. 그럼에도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는 그리운 마음에 다시 어묵볶음을 만드셨던 것인데 이 일도 거의 십여년 전의 일이 되어버렸다.


  가뜩이나 고향에 잘 내려가지도 않는 편이었고, 명절이라 하더라도 고향에 3일 이상 머무르면 가족은 싸운다는 뚜렷한 철학을 가진 채, 서울에서 30대 초반을 보냈다. 불효하게도 직장일을 하다보니 고향에 내려가는 것도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던 중 작년엔 드디어 결혼도 했는데 얄궂은 전염병 탓에 고향에는 더더욱 못 내려가고 있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결혼을 하면서는 잔잔하게 요리도 시작했고 밑반찬도 꽤 만들어보았다. 간장과 설탕, 다진마늘, 굴소스, 물엿, 고추가루를 섞어서 식용유에 살짝 끓여다가 썰어놓은 양파랑 어묵, 거기에 청양고추 정도 넣어 볶아서 마무리로 통깨 왕창 뿌려주면 구구절절 써 내려온 어묵볶음 완성. 지금은 고인이 되신 한 시인이 성탄절을 맞이하여 불현듯 자신의 혈액 속에 흐르는 알알이 붉은 산수유를 느끼며 부성애를 떠올렸었다면 나는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어묵에게서 내 핏줄을 느끼며 이 밑반찬을 만드는 것일 수도 있겠다.


  문과라서 죄송한 편이지만 어떤 고립된 물리계 내의 에너지는 그 형태가 달라지긴 하더라도 총량은 일정하다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알고 있다. 이렇듯 어묵볶음이 제 아무리 '물리뿌는' 반찬이라 할지라도 그 나름의

물리학 법칙을 지닌 채 수요의 총량을 보존하며 세대를 지나오고 있나보다. 막상 고향에 못 내려가게 되니 다음에 내려가게 되거든 어머니께 어묵탕이라도 끓여드려야 하나 싶다. 아버지는 뭐 해드리지. 어떤 음식이 물리는지 여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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