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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코커피 Jun 23. 2022

내일의 과학은.

제목은 <너의 이름은.> 패러디 | 과학이 대중에게 다가가려면

*본고는 2018년 하반기에 작성된 글로 이미 지나간 시점의 논제를 다루고 있으며, 글쓴이의 현재 생각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건설적인 논의와 비판을 환영합니다.




동떨어진 세계

‘인구론(인문계 90%는 논다)’,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 인문계 전공자들의 취업이 어려운 현실이 반영된 이 단어들은 몇 년 전 크게 이슈가 된 이후 지금까지도 종종 언급된다. 청년들의 최대 관심사인 취업에 이공계열이나 자연계열의 전공이 더 유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이과’는 ‘문과’보다 적다. 2019학년도 수능 응시자 수*만 보아도, 전체 학생 중 이과 교육과정 범위 내에서 출제되는 수학 '가'형을 선택한 학생은 '나'형을 선택한 학생의 절반이었다.** 즉 이과 적성을 가진 학생이 더 적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과 적성’이란, 대체로 수학·과학적 사고력과 사물 및 현상의 인과관계를 원리에 입각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이해되는데, 수학·과학 원리를 기술하는 데 사용되는 용어나 수식 등이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인지 이과 학생들은 ‘이해할 수는 없지만 왠지 대단해’ 보인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


* [유성룡의 입시 포인트] 2019학년도 수능시험 응시원서 접수 결과 (2018. 09. 13), 조선에듀, http://edu.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9/13/2018091300870.html

**사회탐구에 응시한 학생과 과학탐구에 응시한 학생의 비율은 큰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과학탐구를 응시해야 지원해야 할 수 있는 학과 중 간호학과 등 문과 학생의 교차지원이 가능한 학과의 경우 수학 ‘나’형을 응시하여도 상관이 없기 때문에, 실제로 이공계 또는 자연계 전공을 가진 학생의 비율은 수학 ‘가’형의 응시자 수에 반영된다.

***혹은 "감성 파괴자"라던가, 좀 더 과격하게는 "이과 XX으면"이라는 얘기도 듣는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공계열/자연계열을 공부한 사람이 다른 이들보다 딱히 더 대단한 것도 아니고, 수식 몇 줄 이해할 줄 안다고 세상 만물의 이치를 다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그저 세상의 많고 많은 적성 중 하나를 가진 것뿐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가져오는 가치가 크다고는 하지만, 대중이 그것을 마냥 대단하다고 느끼는 것에서 그친다면 과학계는 결국 세상과 단절되어 ‘그들만의 리그’로 남을 수밖에 없다. 과학이란 학문의 지평이 넓어지면, 과학과 대중 사이의 지식 장벽도 함께 높아지기 때문이다. 과학과 대중은 결코 가깝지 않다. 과학이 발전할수록 대중과의 괴리는 더욱 필연적인 문제가 된다.     


우리는 모두 과학자여야 합니까?

미래의 과학기술인재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국가는 과학이 대중과 단절되는 곤란한 상황을 방지해야 한다. 현재 주로 실행되는 대책은 대중에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과학관련 축제 및 행사의 개최이다. 그러나 과학축전의 체험부스 운영 실태를 살펴보면 말 그대로 놀이와 체험에 그칠 뿐, 과학적 원리의 설명은 뒷전이 경우가 허다하다. 보통의 목적은 과학 원리를 적용한 장난감을 기념품으로 가져가기 위함이다. 과학에 대한 흥미와 관심 유발을 위한 체험 부스 운영이 원래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즐거움만을 남기게 된 것이다. 과학적 원리를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일상의 과학 현상을 함께 관찰하고 질문을 던지며, 체험자 스스로가 호기심을 갖고 과학 원리를 습득하기 위한 자세를 가져야 하겠지만 이렇게 바람직한 방향으로 운영되는 체험부스는 찾아보기 어렵다. 체험부스의 대상이 과학적 원리를 잘 모르는 대중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과학적 지식이 없을 뿐 아니라 일상의 현상에 대한 과학적 호기심 또한 결여되어 있을 수 있다. 과학 관련 행사에 참여하는 모두가 과학도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과학축전이 과학과 대중을 얼마나 잘 이어 줄 수 있느냐를 논하기 전에, 과연 과학이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가야 하는지부터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현대 사회는 철저한 분업 사회이며, 모든 사람은 제각기 자신이 맡은 역할을 해 나간다. 과학은 말 그대로 과학자의 일이다. 간단한 예로, 우리가 매일 버스를 탄다고 해서 버스 기사만큼의 운전 실력을 가져야 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버스 기사가 왜 필요한지, 버스 기사가 없다면 우리 생활이 얼마나 불편할지에 대한 생각 정도는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과학과 대중의 거리가 과연 이보다 더 가까워야 할 필요가 있을까? 과학이라고 다를 것은 없다. 과학기술이 사회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발전에 기여해 왔다는 정도만 이해해도 이미 대중으로서 훌륭한 수준의 이해를 갖춘 것이다. 중요한 것은 대중이 얼마나 이해하는가 보다도, 대중이 과학계의 행보에 얼마나 공감할 수 있는가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것이 자신의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이해하는 것으로 대중의 역할은 충분하다.


가치를 알리자

과학이 대중과 친근해지려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대중의 공감, 즉 국민의 공감을 얻어야 연구를 실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자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연구자는 자신의 일을 계속하기 위해 연구비가 필요하고, 그 연구비는 상당 부분 국가가 주도하는 주요 정책과 사업에서 나온다. 국고를 채우는 세금의 주인인 국민의 공감을 항상 신경 써야 할 수밖에 없다. 과학기술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연구에 막대한 인력과 자본이 들어가는 현재의 상황에서 연구는 돈의 흐름을 좇을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결국 과학기술은 ‘무지한’ 대중에게서 멀어질 수 없으며 어떻게든 그들을 설득시켜야 한다.


여기서 과학기술이 대중에게 이해시켜야 하는 것은 과학의 원리가 아니라 과학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의 가치이다. 대중은 단순히 경제적 발전이나, 자신의 생활 반경 내에서 감지되는 변화뿐 아니라 왜 과학자들이 그 문제를 풀기 위해 분투하는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과학자는 어떻게든 과학의 발전이 당신들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어필하고, 또 그것을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탐구에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한다. 이러한 이해가 자리 잡은 후에는, 대중은 과학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만 생각하면 된다.


한편, 모든 사람들이 가치 있다고 여길 만한 문제를 과학자라는 특정 집단 내에서만 제안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문제를 제안하는 것 또한 대중의 역할이다.* 과학자는 이런 대중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 노력해야 한다. 학문의 발전만 도모해서는 더 이상 그 자리를 지키기 어려울 테니 말이다.


*김학수 (2018). "과학커뮤니케이션의 현재와 미래",  『과학과 기술』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발간), Vol. 589 (2018년 6월호), 32-35쪽.

    

고인 물이 흐르려면

현대 사회에서 과학 연구는 결코 순수 지성의 결정체가 아닌 필요의 산물이다. 인간에게 도움이 되고, 사회 전반에 효용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과학의 발전이 허용된다. 현재의 세태를 살펴보면, 당장의 이익을 가져오거나, 학문적 선도가 가능한 연구 주제를 다루는 경우가 아니면 연구비를 끌어오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당장 돈이 되는 연구는 그렇다 쳐도, 세계적으로 선도할 수 있는 분야에 연구비를 투입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될까. 중요한 것은 이러한 분야에 연구비가 투입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연구비의 배분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냐는 것이다. 선도적인 연구는 각 분야의 석학들에 의해 실행된다. 이미 그간의 실적으로 충분한 명성을 쌓았고, 그 분야에서 가장 큰 문제들을 해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국가는 이들에게 어떠한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큰 문제를 제시해줄 것을 요청하고 여기에 맞춰 연구비를 지급한다. 이는 결과적으로 많은 연구비를 투입하여 해당 분야를 계속 선도해나갈 수 있도록 유지하는 것에 불과하다. 같은 유전자를 타고난 쌍둥이라도 잘 먹은 아이가 더 살집이 붙는 것이 당연하듯이.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연구를 위해서는 빈익빈 부익부를 심화하는 지금의 관성적인 연구비 정책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떤 집단이든지 최상위 집단이 ‘고인 물’이 되어버리면 발전은 더딜 수밖에 없다. 지금처럼 구태여 저수지를 만들어 두기보다는 새로운 물이 흘러들어올 기회를 주어야 한다. 생각해 보자. 대중이 제시한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많은 과학자 집단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더 좋은 해결책을 내기 위해 의지를 불태우는 선의의 경쟁을 말이다. 특정 집단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업적을 쌓아왔는지 보다는 연구 계획의 타당성과 해당 연구가 미칠 영향력을 고려하여 연구비가 배분되고, 연구의 과정과 결과가 투명하게 보고된다면. 이러한 이상이 실현될 때 과학계는 연구비 지급의 불균형에서 비롯되는 지금의 정체 상황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대학원에 당연히 가서 당연히 박사학위를 받고 당연히 연구자가 될 거라고 믿었던 22살의 과학도로서 쓴 글입니다. 유명한 교수님이 써야 할 법한 주제로 제법 강한 논조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학계에 다시 발을 들일 생각이 없는 요즘은 생각해볼 일이 적은 주제가 되었습니다. 비하인드를 풀어보자면, <글로벌 리더십>이라는 수업에서 정말 쓰고 싶은 생각 없는 주제로 읽고 싶지 않은 글을 읽어 가며 써 보았던 글이, <비판적 사고와 글쓰기> 수업에서 훌륭하게 재탕되었습니다. 브런치로 삼탕까지 했으니 이제 그만 우려먹어야겠어요:)


대학원생들 중에는 연구가 재미있고 흥미로워서 계속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실상 바쁜 일상에 치여 살다 보면 우리가 세상에 미칠 영향에 대해, 나아가야 하는 방향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시간은 적다고 느껴집니다. 혹 비전공자일지라도 한 번쯤은 생각해볼 문제인 것 같습니다. 연구비에 들어가는 돈이 적지는 않으니까요. 사실 당사자가 아니라면 관심이 없는 과학기술정책입니다만, 그 관심을 끌어오는 것도 과학자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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