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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코커피 Jul 02. 2022

1. 열심히 살아왔는데 이력서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8년 동안 과학자의 미래만 그리던 사람이 연구의 길을 떠나면

지금부터 할 얘기는 많은 과학영재들의 이야기일 수도, 단지 나 개인의 독특한 경험일 수도 있다. 내가 어떻게 나름대로 연구의 길을 걷기 위한 경험을 쌓아왔고, 그 길을 떠났고, 다시 돌아가려다 멈춰 서게 되었는지를 기록해보려 한다.


필자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과학자의 꿈을 품었다. 과학영재고를 준비하기엔 늦었고, 과학고를 들어갈만한 내신은 충분했지만 내심 몇 년씩 준비해온 친구들 사이에서 얼마나 경쟁력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과학중점학교에 진학했다. (이것은 지금 생각하면 조금 후회가 된다. 중학교 1등 내신은 특목고에 진학하지 않는 이상 더 이상 아무 쓸모도 없기 때문이다.) 내신도 수능 공부도 비교과 활동도 빼놓지 않고 열심히 챙기려 했고, 실험대회에 학교 대표로 나가 교육감상도 받고, 학교 발명반에 들어가 발명 아이디어로 특허도 2건 출원하게 됐다. 그 결과, 최종 합격한 대학교들에서 전부 장학생으로 합격했으며, 한국장학재단에서 대통령과학장학생으로 선정되었다. (여담이지만, 이때 당시 그 '비선 실세' 사건으로 인해 우리 기수는 사상 최초 '대통령권한대행장학생'이 되었다나 뭐라나.)


2014 - 2015 YIP 청소년발명가프로그램


특허출원 업무는 변리사의 몫이지만, 나는 도면 제작부터 청구항 작성까지 모두 정성들여 제출했다.




진부하지만, 내 꿈은 세계적인 과학자


고등학교 내내 가졌던 꿈은 '세계적인 수준의 연구를 하는 과학자'였다. 그래서 내심 속으로 '이 정도 수준의 학교는 되어야 연구로 경쟁력이 있지'라고 정해두고, 그 선 안에 진학하기 위해 그렇게도 열심히 공부하고, 활동했다. 그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하려면 대학원 유학은 필수라 믿었고, 필자가 진학한 학교에서는 해외 대학원 연구실로 파견을 보내주는 프로그램이 있었기 때문에 입학 당시부터 그 기회를 꼭 얻으리라 마음먹었다. 그렇게 해서 얻어낸 존스홉킨스 의과대학 연구실의 인턴 경험에서 기대했던 것보다는 실험 능력이나 연구 역량이 크게 성장했다 느끼지는 못 했지만(겨우 8주 정도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새로 배운 실험도, 기록으로 남은 연구노트도 있어 어쨌든 이력서에 한 줄 남길 훌륭한 스펙이 되어주었다. 체류 말미에는 다양한 Thesis 발표나 세미나를 듣기도 하면서 유학(?) 생활을 나름 즐겼다. (당연히 여행도 다녔다!)


JHU SOM 인턴 당시 썼던 연구 일지 & Thesis 발표내용 정리한 것


그런데 4학년이 되면서, 유학을 갈지 국내 대학원에 진학할지가 고민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하며 독립생활이 익숙했고, 이렇게 떨어져 지내면서도 부모님과 이런저런 트러블이 있었는데, 그게 어느 정도 해소되면서 가족에게 심리적인 애착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나도 부모님께 돌봄 받을 수 있었으면 했다. 또 진학에 앞서 가장 큰 문제는 도무지 어떤 분야로 진학할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해외 인턴십에서 공부했던 주제도 Parkinson's Disease 였고 졸업연구도 신경세포와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뇌신경과학 쪽으로 진학을 할 것인지 아니면 분자생물학 연구를 할 것인지가 고민이었다. 생명과학이라는 폭넓은 이름 아래 정말 많은 분야가 있기 때문에 이 고민은 참 어려웠다. 일단 꿈이 '과학자'였기 때문에 석사 연구원으로 반복 실험만 하기보다는 직접 연구를 지휘할 수 있는 박사학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석박통합 과정으로 진학할 예정이었고, 흥미분야에 어느 정도 맞는 연구실에 진학해야 박사과정 5~7년을 덜 힘들게 보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욱 '관심 있는 연구주제가 무엇일까' 탐색하는 데 집중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인생의 가장 큰 터닝포인트를 맞게 된다.

결과적으로는, 연구를 아예 그만두게 되는.


4학년 1학기 때 <생명과학특강>이라는 수업을 들으며 한 연구주제에 꽂혀버린 탓이었다. 그대로 그 연구실에 진학하겠다는 결심에 교수님 면담을 신청하고 여름방학 때 대학원 1차 모집에 지원했다. 결과는 당연히 합격. 그리고 대학원에 진학하면 이제 더 이상 놀지 못하겠다는 생각으로 2학기 때는 그냥 열심히 남은 학교 생활을 즐겼다. 공강을 맘껏 즐기고 여행도 다녔다. 연구실 생활을 미리 해보지 않은 것이 어떤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지 까맣게 모른 채로 말이다...


국내 대학원, 그것도 자대에 진학하기로 했다고 하자 학부 지도교수님(수학 전공)께서는 사실 나를 말리셨다. 사람이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들 가운데 있어야 한다고. 유학을 가든지 아니면 KAIST처럼 모두가 가려하는, 인재들이 모이는 곳으로 가야 한다고 말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내 능력이 뛰어나면 학벌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항상 생각하던 순진한 과거의 필자는 그 "이름값"을 충분히 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값"이면 구구절절 긴 설명 없이도 자신의 능력을 어느 정도 증명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로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SKP 대학원은 솔직히 못 갈 것도 없었다. 실제로 많은 동기들이 진학했으며, 내 학업 성적은 학교에서도 좋은 편에 속했고, 연구 경험도 꽤 있는 편이었으니까. 지금도 다시 연구를 하고자 한다면 충분히 고려해볼 수 있지만... 글쎄.)


학부 지도교수님은 입시 때부터 필자의 자기소개서를 읽고 합격시키셨기 때문에 고교 활동 내역들도 모두 알고 계셨고, 처음부터 '너는 생명과학, 그리고 연구에 맞지 않는다'라고 생각하신다는 걸 종종 드러내셨기도 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교수님 말씀이 다 옳았다. 나는 그 연구실에 진학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고, 더 이상 연구가 하고 싶지 않아 졌다. 그 사실이 조금 서글프지만, 어쨌든 교수님이 옳았다.


나는 연구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너무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으며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문제가 연구실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까지 알게 되어 완전히 정이 떨어져 버렸다. 고된 하루 끝에 고요한 자취방에서 서럽게 울음을 터뜨리면서, '더 이상 연구실 생활을 지속할 수 없다'라고 느꼈고, 하고 있던 실험이 정리되자마자 교수님과 사수에게 면담을 요청하고 한 학기만에 휴학 신청을 했다. 혹시나 정말, 정말 만약에 내가 다시 연구를 하게 될 수도 있으니 아직 모두에게 공개되는 이 공간에 이야기를 풀어놓기는 어렵지만, 다른 직무로 취직에 성공하게 된다면 언젠간 이 이야기도 풀어놓고 싶다. 정말... 할 얘기가 많거든. (요즘 네이버에서 하는 대학원 일상툰을 가장한 대학원 진학 방지 캠페인(?)이 있는데 거기 내 사례도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https://youtu.be/e2ZppLeLxJY

연구실 생활을 하며 취미로 시작했던 vlog


휴학을 하고 나서 맘 편히 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설상가상으로 개인적인 악재까지 겹치면서 이미 상당한 우울감을 갖고 있던 나는 완전히 삶의 의지를 잃어버렸다. 더 이상 삶을 지속할 이유를 알 수 없었고 매일 죽고 싶은 이유만 한가득 떠올랐다. 처음에는 무작정 울음주머니가 찰랑거리는 답답한 속을 그러안고 미친 듯이 걸었다. 그나마 걸어서 닿을 수 있는 거리에 한강이 있다는 게, 어딘가로 떠나고 싶을 때 떠오르는 장소가 있다는 게 다행이었을지도. 그런데 그마저도 좌절시키는 사건이 있었고, 완전히 무력해진 나는 그렇게 거의 1년 정도를 누워서 보냈다. 그나마 내 삶의 이유는 매일 야구 중계를 보는 것 정도였다. 그렇게 나는 1년여를 우울과 싸웠다. 그리고 상황이 조금 나아진 반 년간에도 그저 야구를 보거나, 게임을 하며 보냈다. 여전히 거의 침대에 누워 지냈으나 가끔 외출도 하게 되었고 (처음 한 두 달은 걸을 때마다 아킬레스건 쪽이 계속 뻐근할 정도로 건강이 많이 악화되어있었다) 더 이상 죽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여전히 살아가는 이유는 찾기 어려웠다. 나는 종교도, 오랫동안 그리던 꿈도 손에서 놓았고 그 두 가지는 그동안 내 삶을 가득 채우고 있던 가장 큰 요소들이었다.




다시, 연구?


올해 1월, COVID-19 백신의 여성 특이적 부작용(생리 불순)에 대해 의문을 품으며 왜 이런 부작용들이 사전에 보고되지 않았는지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또 그 망할 <생명과학특강> 생각이 났다. 생체시계를 연구하는 교수님께서 강의하신 내용을 듣고, 특정 성별의 쥐만 사용하시는 것에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었다. '여성호르몬 때문에 관찰 결과가 달라질 수 있어서 male만 사용하셨다면, 생체 리듬에 여성호르몬이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뜻이고 실제로 female을 사용했을 경우 교수님이 연구하신 결과가 적용이 안 될 수도 있지 않은가?'라고 물었더니 교수님은 아주 심플한 답변을 남기셨다. "뭐, 그럴 수도 있겠네요." 아주 여상한 어조로, 전혀 생각해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생각할 일이 없다는 것 같았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들렸다.


갱년기조차 경험하지 않으신 젊은 남자 교수님이셨기 때문에 여성들이 호르몬 변화를 얼마나 체감하고 있는지는 알 턱이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내 뇌리를 스쳐 지나간 것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또, 시중에 판매하는 약의 경우도 보통 표준 임상시험 대상자가 175cm, 65kg 남성 이런 식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승인되어 판매된 이후에도 여성에서 특이적인 부작용이 발생하여 급하게 회수된 경우가 있었다. 이렇게, 성별의 차이를 연구하는 '성차 의학' 연구에 대한 필요성이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 정보를 얻은 영상조차 영 내가 짚은 비판점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고 있어 솔직히 조금 실망하기도 했다.)


이런 연구를 한다면 정말 세상의 발전에 기여하게 되는 게 아닐까? 그리고 이게 가능하려면 정말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 제대로 배우며 내 문제의식에 공감해줄 멘토를 만나야 하지 않을까? 정말 오랜만에 연구에 대한 기대감이 생겼다. 여성 임상시험이 턱없이 부족한데도 많은 약과 치료제가 승인되고 판매되는 현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제대로 된' 연구를 수행할 줄 알아야 하고 그러려면 연구를 계획할 때부터 통계적 유의성이 충분히 확보될 수 있는 실험군과 대조군을 짜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보자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보건의학통계 책으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즐거웠다. 내 하루가 다시 바삐 굴러가는 느낌이 좋았다.


급하게 교수님들께 연락을 돌렸다. 유학을 가려면 추천서가 3장씩이나 필요하니까. 당장 9월에 접수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빠르게 어학 성적을 취득하고, 자기소개서를 써야 했다. 해외 인턴십을 했던 교수님께, 학부 때 존경했던 전공 교수님께, 졸업연구를 지도하신 박사님께. 특히 두 분의 교수님은 zoom 미팅까지 잡아 주셨다. 무척 바쁘셨을 텐데 나를 위해 시간을 내어주신 것에 정말 감사했다. 그리고 나도 두 달 동안 TOEFL 성적을 취득하기 위해 주중에는 매일 3-4시간 이하로 잠을 자며 영어공부에 매진했다.


결국 원하는 수준의 성적을 취득했지만 그 사이 이미 내 마음은 유학에서 떠나 있었다. 토플 시험 준비 막판에, 내가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힘들게 공부를 하는지 끊임없이 속으로 반문했다. 내가 정말 아직도 연구에 이만큼의 열정이 남아있는 걸까? 아니면 그저 공부를 열심히 하던 관성으로, 공부에 가진 재능으로 열심히 하고 있는 걸까?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더 많은데, 긴 공백기와 무소속을 커버해줄 국내 연구실 인턴도 알아봐야 하고, 자기소개서도 써야 하는데... 그걸 다 감당하고서라도 유학을 가고 싶은 걸까? 난 한국에서 직장을 다니며 가족/친구들과 계속 함께하고 싶은데, 내 커리어를 위해서라지만, 가능하기만 하면 일찍 결혼도 하고 아기도 갖고 싶은데 6-7년 혹은 박사 후 연구원을 거쳐 그 이상의 기간을 해외에서 체류한다면 더 어려워지지 않을까? 현실적인 고민을 하게 되었다. 20대 초반에는 고민하지 않던 내 진로 외의 '내 삶'에 관련된 부분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혹자는 '내'가, '내 커리어'가 이런 것들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20대 초반과 달리 나는 이 기나긴 인생에, 당장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약해지고 세상 모든 것에 무뎌질 미래에 '나 혼자 재미나게 능력 뽐내며 사는 것'만으로 내가 행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젊은 날부터 아주 격하게 체험했고, 내가 사랑하고 사랑받을 대상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으며 그것을 인생에서 절대 놓치고 싶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즐거운 '일'이 아니라, 내가 즐거운 '삶'을 생각하자 결론을 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연구자가 아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나


지난주, 처음으로 연구실이 아닌 기업 인턴에 지원하면서 지원하는 직무에 작성할 이력이 거의 없다는 것에 자조했다. 연구하지 않는 나에게는 더 이상 연구와 실험 데이터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력이 필요하지 않았고, 연구자인 내게는 그것이 큰 자산이었지만, 그것을 위해 열심히 쌓아 올렸던 지난 나날은 이력서에 한 줄 쓰일 수 없는 시간이 되었다. 그래도 과제와 포트폴리오를 정성껏 준비해서 면접 기회는 올 줄 알았는데, 서류부터 불합격하며 사회의 쓴맛을 봤다. 아, 이게 바로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구나. 회사는 단지 내가 똑똑하다는 것만으로는 기회를 주지 않는다. 차라리 수능을 다시 보든지 편입을 해서 관련 학과에 들어가 공부를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요즘에는 워낙 직무 관련 온라인 강의도 많으니 하고자 하는 직무를 잘 정해서 준비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테지만, 비전공자로 살아남기란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으며 사회는 냉정하다.


지금 나에게는 기업에서 요구하는 직무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워낙 부족하기 때문에 아직은 무엇이 하고 싶은지 정확히 그려지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애로사항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든 기업 인턴을 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과학기술원 졸업생인 내가 그나마 친숙한 IT기업의 채용 공고를 살피며 내가 뚫고 들어갈 틈을 노리고 있다.


다음 편에서는 이 기업에 제출하기 위해 내가 포트폴리오와 자기소개서에 작성했던 활동들을 소개해보려 한다. 비록 첫 지원에는 서류에 광탈했지만, 덕분에 그동안 내가 했던 활동들을 정리하며 다시 돌아볼 수 있었다. 나름 특별하다면 특별한 경험들이라, 소개하는 것만으로 하나의 콘텐츠가 될 것 같다. '마케터' 직무에서 탈락을 경험하면서 나 스스로 '자기 전시'에 갖고 있는 거부감에서 벗어나 나를 어필할 수 있는 정돈된 기록들을 쌓아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매거진은 내 삶에 대한 기록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흥미로운 콘텐츠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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