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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작나무 Sep 25. 2022

꽃과 분수가 있으니 파라다이스가 멀지 않더라

키르기스스탄 여행기(4) 키질투에서 카라콜까지 175km


키르기스스탄에선 인터넷 연결이 원활하지 않다. 몇 시간씩 걸리는 이동 도중엔 와이파이는 고사하고 심지어 유심칩을 바꿔 낀 사람들조차 전화 통화가 잘 안되는 일이 흔하다. 자연스럽게 적응을 해서 스마트폰은 그저 휴대용 주머니시계 겸 스마트 카메라가 돼 버렸다. 그러다 식당이나 민박집, 호텔처럼 와이파이가 된다 싶은 곳에선 즉시 카카오톡과 문자메시지 수신음이 곳곳에서 들리고 산자락과 지평선을 향하던 시선도 스마트폰을 향한다. 


여행 도중에도 밀린 일을 계속 해야 하는 김지나 노무사는 와이파이가 터진다 싶으면 한국으로 국제전화를 하거나  문자메시지 주고받느라 바쁘다. 전날 말에서 넘어져 팔에 피멍이 들었던 도미라 작가는 어린 딸과 통화하면서 “엄마 말에서 넘어졌어” 하며 모험담을 들려주느라 짧은 와이파이 시간을 쪼갠다. 


전날 이식쿨 구경을 한 뒤 매사냥 시범을 본 뒤 도착한 키질투(Кызыл-Туу) 마을에선 아침에 키르기스스탄 유목민이 사용하던 이동식 가옥인 보즈 우이(боз үй) 만들기 체험을 해봤다. 사실 키질투는 보즈 우이 생산으로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한국에선 흔히 유르타라고 부르는데 유르타는 사실 러시아에서 쓰는 표현이다. 





보즈 우이는 몽골 게르와 대체로 비슷하지만 그렇다고 똑같진 않다. 탄력 있는 버드나무를 깎아 원형 형태로 뼈대를 만든 뒤 그 위를 양털로 만든 펠트천으로 덮는 구조로 돼 있다. 키르기스스탄 국기를 보면 햇빛이 비치는 가운데에 세 줄씩 엇갈려 있는 모양인데 보즈 우이 천장 가운데 있는 환기구멍을 형상화한 것이다. 사실 이 문양은 키르기스스탄 곳곳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상징이기도 하다. 


보즈 우이 장인인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보즈 우이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며 설치 방법을 설명해준다. 하지만 사실 초짜들 도움 없이도 둘이서 뚝딱뚝딱 보즈 우이를 다 완성해 버렸다. 보즈 우이는 생각보다 시원하고 또 기대 이상으로 아늑하다. 요즘은 유럽 등 세계 각지에서 주문이 들어온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마을은 집도 크고 깨끗하고 잘 사는 느낌이 난다.  


스카즈카(Сказка) 협곡에 가면 말 그대로, 입이 딱 벌어지는 풍경을 보게 된다.  붉은 느낌이 나는 황토색으로 된 바위가 끝없이 이어지고 그 뒤로는 푸른 이식쿨이 펼쳐져 있다. 왜 이곳을 키르기스스탄의 그랜드캐니언이라 부르는지 알 것 같다. 러시아어로 동화라는 뜻을 가진 스카즈카 협곡은 이식쿨 남쪽 해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힌다. 키르기스스탄은 고산 초원과 눈덮인 봉우리가 대부분인데 스카즈카에선 붉은 사암이라는 색감만으로도 또 다른 느낌을 준다. 


이 신비로운 곳을 보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관광객이 몰려와 있었다. 프랑스에서 왔다는 중년과 노년 단체관광객, 터키에서 온 슬리퍼 신고 협곡을 오르는 연인들, 독일 배낭여행객, 거기다 한국 사람들도 봤다. 이 곳에서도 어김없이 고 작가가 일행들을 한 명씩 포토존으로 이끌어 사진을 찍어줬다. 풍경이 하도 멋져서 나 역시 못이기는 척 사진을 찍었다.(그 사진은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으로 직행했다.)






수평선과 설산 바라보며 컵라면 먹기 

스카즈카 협곡에서 호숫가 쪽으로 가다보면 스카즈카 파크라는 카페가 있다. 호수가 한 눈에 보이는 언덕에 보즈 우이를 본따 만든 이 카페는 추 대표가 운영하는 곳이다. 추 대표는 며칠간 이어진 강행군에 지친 우리 일행을 위해 컵라면과 햇반, 김치, 수박과 커피까지 대접했다. 


사실 외국 출장가서 한국음식을 찾아본 적이 없다. 외국 가면 그 나라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도 있고, 사실 미식가와는 거리가 먼 둔한 미각인지라 그냥 배고프면 먹고 배부르면 안먹는 식이다. 지금까지 가장 긴 여행은 2011년에 순회특파원으로 6주 동안 3개 대륙 9개 나라를 돌아봤을 때였는데 그 때도 굳이 일부러 한국식당을 찾아다닌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래도 경치 좋은 곳에서 수평선과 눈쌓인 산을 보며 라면에 밥 말아 먹으니 배부르고 기분은 좋다. 


스카즈카 협곡에서 100km 가량 동쪽으로 달리면 제티오구즈(Жети-өгүз)가 나온다. 일곱 황소라는 뜻이다. 거대한 붉은 바위 7개가 연달아 있어 신비로운 느낌을 물씬 풍긴다. 이 곳에서 하는 체험은 나중에 두고두고 일행들에게 오랜 추억으로 남았다. 유목민은 역시 말이고, 유목문화를 알려면 역시 말을 타 봐야지.  

예비군 말은 괴롭다 

사실 처음 말타기 체험을 한 건 19일 타쉬라밧 근처였다. 첫 승마 체험은 썩 유쾌하진 못했다. 말을 타기 전에 간단한 교육과 주의사항을 들었다. 키르기스스탄에선 말을 타고 출발할 때는 “추우”라 하고 멈출 때는 “드르르”라고 한다. 말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타고, 내릴 때도 왼쪽으로 내린다. 말 뒤에 서 있는 건 위험할 수 있다. 


말타기는 책을 읽는다고 될 문제가 아니다. 막상 말을 타 보면 말은 초짜들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외국인 초짜들을 위한 말이니 성질이 좀 온순하고 훈련이 잘 돼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말을 타 봤다. 말과 사람의 교감이 중요하다고 했지. 이 놈에게 이름을 지어주자. 똘똘하게 내 말을 잘 들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똘똘이 스머프”라고 불렀다. 패착이었다. 똘돌이 스머프답게 불평불만만 많다. 


일행이 저만큼 가는데 똘똘이 스머프는 느릿느릿 하다가 무리에서 뒤쳐졌다. 속도를 내라고 해도 듣는 둥 마는 둥이다. 작은 개울 앞에선 아예 멈춰 버렸다. 독촉을 해도 소용이 없다. 급기야 이 놈 제멋대로 말머리를 돌리더니 집으로 달려가기 시작한다. 퇴근 욕심이 충만한 건지 이제껏 볼 수 없었던 빠른 발걸음이다. 퇴근시간만 되면 빠릿해지는 이 놈은, 설마 예비군인가?


순식간에 말을 처음 탔던 마굿간까지 와 버렸다. 결국 말 주인이 나서야 했다. 팔자에도 없는 견마잡이가 시작됐다. 다행히 일행들과 만나 무리를 이루고 나선 말 주인 없이도 그럭저럭 잘 따라준다. 퇴근에 진심인 예비군 스머프 어르고 달래서 집 주변을 한 바퀴 더 돌았다. 야근수당은 없다 이 놈아. 


제티오구즈에서 두 번째 승마체험을 할 때는 이틀 전보단 훨씬 자세도 잘 나오고 말을 통제하는 것도 더 수월했다. 조금씩 속도도 내서 앞질러도 보고 차선 바꿔 유턴도 해봤다. 자신감이 붙으니까 달리기도 시도해봤다. 거의 두 시간 가까이 말을 탔다. 끝나고 보니 오히려 아쉬워서 좀 더 타고 싶어졌다.   




저녁녘에 카라콜(Каракол)에 도착했다. 이식쿨 남부 중심도시인데, 소련 시절엔 러시아 탐험가 이름을 따서 프세발스크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구글지도엔 이 이름으로 나온다. 19세기에 청나라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키르기스스탄으로 쫓겨와 정착했다는 둥간 사람들이 세웠다는 모스크 청진사는 중국식과 이슬람 양식이 섞여 있다. 돔과 탑이 아니라 처마가 늘어서 있는 모스크라니.  


모스크를 구경하다 마주친 한 할아버지에게 “앗 살람 알라이쿰”이라고 인사를 건넸다.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단체관광으로 왔다고 한다. 모국을 소개하면서 “오일 오일”이라고 해서 둘이 한참 웃었다. 청진사 정원에 있는 살구나무에는 살구가 먹음직스럽게 한가득 열려있다. 살구를 따먹다가 만난 아저씨 역시 사우디아라비아 사람인데 그는 1990년대 후반에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한다. 현대자동차와 스키, 그리고 “나를 스트롱맨으로 만들어줬다”는 인삼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저녁을 먹은 식당은 여러가지로 우리를 놀라게 했다. 전통악기로 흥이 넘치는 멋진 연주를 들을 수 있었다는 게 첫번째다. 둥간 사람들에서 유래해서 이 곳 명물이라는 전통 국수가 첫번째다. 국물이 칼칼한 게 해장에 딱 좋은 맛이다. 긴 여행에 지치고 배고픈 여행자들이 국물까지 남김없이 들이켜게 만드는 마력을 지녔다.


보즈 우이 모양 빵으로 덮개를 만든 큰 요리가 세번재 하이라이트다. 덮개를 열자 감탄이 절로 나오는 볶음밥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늘과 고추도 들어있어서 제법 매콤하게 맛있는데, 양이 너무 많아서 먹다 지쳤는데도 절반을 채 못 먹었다. 결국 남은 음식은 포장하기로 했는데 포장용기로만 14통이 나왔다.(이 볶음밥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우리를 따라다녔다.)










꽃이 있고 분수가 있다면 그곳이 곧 파라다이스


모스크도 그렇고 저녁을 먹은 식당, 거기다 호텔까지 공통점이 있다면 정성스레 가꾼 정원이다. 사실 키르기스스탄 곳곳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보게 되는 광경이기도 하다. 집집마다 정원에는 꽃나무를 심었다. 여력이 된다면 분수도 설치해서 시원한 물이 솟아나게 했다. 


정원 뿐 아니라 초원에도 이름 모를 꽃이 지천이다. 색깔도 가지각색이다. 초원은 가까이에서 보면 햇빛에 딱딱하게 말라붙은 소똥과 말똥이 한가득인데 그게 또 야생화와 묘하게 잘 어울린다.  


그리고 보면 파라다이스란 말은 원래 페르시아어에서 '숨겨진 곳'이라는 뜻이로 한다. 어원을 따져 보면 pairi-(주위), daeza(담장) 즉 '담장으로 둘러싸인 곳'이라고 하니 담장에 둘러싸여 숨겨진 정원이 바로 파라다이스다. 뜨거운 햇빛 아래 힘겹게 찾아온 여행자에게 꽃과 분수가 있어 눈을 맑게 하고 목을 축일 수 있는 정원은 그 자체로 낙원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을까 싶다. 



출처: https://www.betulo.co.kr/3155?category=460185 [자작나무통신: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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