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中 |김초엽
사서는 짧은 침묵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은하 씨는 여기 어딘가에 계실 겁니다. 다만 찾을 수가 없어요."
내가 죽어서 누군가 나를 진짜처럼 잘 만들어 보관해준다면, 나는 기억되기를 원할까?
이 이야기에서 '마인드'는 더 이상 살아있지 않은 누군가를 데이터화 하여 보관하는 형태를 말한다. 이 소설 속 도서관은 책을 보는 곳이 아닌 현재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이 소설은 어머니의 사후 실종으로 시작해 어머니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야기의 시작에 어머니는 어머니가 아닌 '은하 씨'로 등장한다. 은하 씨는 죽은 뒤 도서관에 데이터화 하여 보관되었지만 그의 딸이 3년 만에 찾아갔을 때 은하 씨는 도서관 내에서 분실된 후였다.
딸은 어머니를 미워했다. 어머니는 자신의 감정에 휘둘려 자식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딸은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고 떠나기로 결심했다. 딸은 의도치 않은 임신에 어머니를 찾아 나섰고, 그의 존재를 되돌아보게 된다.
'한국 사회는 어머니가 스스로 자신임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들을 남기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딸이 분실된 데이터 속에서 어머니를 찾기 위해 그녀의 존재를 입증할 것들을 모으는 과정에서 나는 멍하니 글을 읽던 것을 잠시 멈춰야 했다. 내가 지금까지 왜 결혼과 출산에 대해 이유 없는 거부감을 느꼈는지 조금 알아차리게 된 것 같았다.
소설 속 어머니, 은하 씨의 많은 유품들에 오로지 그 자신인 것은 결혼 전 일했던 직장에서의 결과물이 전부였다. 전부 남편, 혹은 아이와 관련된 물건들 뿐이었다. 어머니라는 이름 아래로 은하 씨는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나는 철이 들 나이가 되어서도 엄마를 속으로 미워했다.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어릴 때 엄마가 나에게 주었던 상처들을 잊을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몇 년 전 우울증을 심하게 겪었다. 내가 원하고 바라는 많은 것들이 전부 내 손에는 쥐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에 잠겼었다. 우울이라는 작은 웅덩이는 점차 깊어졌고 발아래 찰박이던 흙탕물은 나를 잠식해 어느 날부터 나는 세상에 존재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우울감에 정신을 차리기도 힘들 때, 엄마의 말이 나를 일으켰다.
"불안과 우울은 나아지고 없어지는 게 아니야. 그건 언제든 네 안에 남아있고 때때로 너를 괴롭게 만들 거야. 근데 그건 친구 같은 거야. 평생 곁에서 네가 안고 잘 보살피면서 살아가야 하는 거야."
그 말이, 내 엄마의 지금까지의 삶을 설명해 주는 것 같았다. 엄마는 얼마나 긴 시간을 이 깊은 웅덩이에 걸터앉아 해가 뜨기를 기다렸을까. 어쩌면 해가 떠 웅덩이가 마르기를 바라면서 더 깊어지지 않게 계속 지켜봐 왔던 것이 아닐까.
그 과정에서 그가 엄마로서 한 잘못들을 실수로 여기고 싶진 않다. 다만 그것은 그가 할 수밖에 없었던 몸부림이었던 것 같다. 엄마라는 이름 아래로 더는 가라앉고 싶지 않은 마음이 부정적으로 표출되었던 것은 아닐까.
엄마의 이십 대와 지금 나의 이십 대는 아주 많이 달라졌음에도, 나는 여성의 삶에 대해 고민한다. 여성이어서 엄마가 되어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받는다. 여전히 결혼과 출산이 직결되어있다고 생각하는 또래의 연인과 여러 번에 나누어 긴 대화를 나눠야 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서는 별나거나 억척스럽다는 말을 들어야 하기도 한다. 나는 여전히 이러한 현실 속에서 남편과 자식의 뒤에서 보조를 맞출 자신이 없다. 그러나 혼자서 고군분투하며 특이한 사람으로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많은 엄마들은 시대적 흐름에 밀려 엄마가 되어야 했고, 당신의 온전한 인생은 길지 않았다. 왜 어머니의 인생은 온전하지 못할까. 왜 어머니의 고통에는 아버지의 부재가 뒤따를까. 왜 결혼한 여성이 출산을 하지 않고,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출산을 하는 것에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릴까.
나는 여전히 나의 엄마에 대해서도, 또 세상의 많은 엄마들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많은 엄마들이 엄마라는 역할 옆에 자신의 고유한 이름을 적기 시작할 때를 응원하고 싶다. "내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을 더 많이 만들어 나중에 그들이 죽은 뒤에도 스스로 기억되길 바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