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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밑하나 Aug 08. 2022

산과 바다

<빙그르르 귀촌라이프> -2

산과 바다 중에 고르자면 늘 바다가 더 좋았다. 

여름 휴가지로 계곡보단 해변을, 등산보단 수영을 훨씬 좋아했다. 바다 멀리 수평선이 보이는 것이 좋았고 잔잔한 바닷물에 석양이 비치는 모습은 언제 봐도 경이로웠다. 마음이 설레는 사람을 만나면 늘 바다로 가자고 했다. 


나는 여전히 바다가 좋다. 

그리고 산은 조금 더 좋아졌다.


산의 일 년은 생각보다 더 변화무쌍하다. 같은 여름의 풍경이어도 7월의 시작과 끝은 아주 다른 색을 띤다. 덕산의 겨울은 아주아주 긴데 어떤 날은 마치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시들었다가 흰 눈이 소복이 쌓인 날에는 마치 새 옷을 입은 듯 곱게 반짝인다. 


지난겨울은 기대했던 것만큼 눈이 많이 오지 않았다. 나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덕산을 기다렸는데 겨우내 함박눈이 쏟아지는 것은 제대로 구경도 못해서 서운해하고 있던 어느 날, 마침에 온 세상이 눈으로 하얘지고 있었다. 서울에 가야 하는 일정이 있었지만 눈이 이렇게나 오는데 꽁꽁 언 시골길을 운전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기꺼이 일정을 포기하고 "지독한 덕산의 겨울" 속에 고립을 선언했다. 


한 이틀을 그렇게 집에만 박혀있었던 것 같다. 혼자서 눈사람도 만들고, 사진도 찍었다. 눈은 그쳤지만 날이 추우니 눈이 잘 녹지 않아서 내심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눈이 오고 삼일째 되던 날, 여전히 집 주변과 산엔 눈이 가득 쌓여있지만 꼭 나가야 할 일이 생겨 조마조마 한 마음을 안고 운전대를 잡았다. 

차로 딱 3분만 나가니 도로의 눈은 찾아볼 수 없었고, 햇빛이 세상을 다시 녹이고 있었다. 이곳 덕산은 산 하나를 넘을 때마다 날씨가 달라지는 곳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나는 밤바다의 풍경을 좋아한다. 오징어잡이 배에 달린 전구가 흔들리고, 해변가나 항구 주변에 늘어선 가게에서 나오는 불빛이 바다에 비치는 모습이 아름답다. 새까만 바다가 들려주는 파도소리가 내 많은 걱정거리들을 가볍게 비웃으며 씻겨주는 듯해서 좋았다. 


산의 야경은 바다에 비해 곱절로 어둡다. 마음을 내어 고개를 들어야 볼 수 있는데, 그마저도 날씨가 허락해주어야 멋진 야경을 볼 수 있다. 내가 사는 덕산은 대부분의 농촌지역처럼 논밭이 많고 가구수가 적어 가로등이 설치되어 있는 곳이 많지 않다. 처음엔 불편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구름이 없는 날 밤에 굳이 가로등 불빛이 전혀 닿지 않는 곳을 찾아간다. 고개를 한껏 젖히면 수많은 별들이 밤하늘을 채우고 있는데 눈이 어둠에 적응하는 시간 동안 점점 더 많은 별이 보이는 재미가 있다. 


찍는 동안 콧물이 얼어버리는 겨울밤의 별


한 번은 아주 맑고 추운 겨울날 밤에 문득 별이 보고 싶어 져서 방에서 쓰던 빈백을 들고 집 앞으로 나갔다. 두꺼운 옷을 머리끝까지 덮어쓰고 하늘이 가장 넓게 보이는 곳에 빈백을 대충 툭 던져 몸을 기댔다. 이제 목 아플 일 없이 한참 동안 별을 구경할 참이었다. 당시 내가 지내던 숙소엔 집주인 내외가 안쪽에 살아서 드나들 때엔 반드시 내가 사는 숙소 앞을 지나쳐야 했는데 그날은 손님이 왔었는지 갑자기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많이 깜깜한 밤이어서 내심 나를 못 보고 지나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손님 중 한 명이 '저거 동물이야?'라며 낮은 비명을 질렀다. 

야생 동물이 사람이 사는 곳까지도 내려오는 일들이 빈번한 산골 마을에선 충분히 생길 수 있는 오해였다. 나조차도 밤에 조용히 나와 별을 보고 있을 때 고라니 같은 동물들이 꽤 가까이서 지나치는 것을  종종 봤으니 그렇게 놀라도 할 말 없을 일이었다.

급하게 몸을 일으켜서 내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했고 불필요하게 놀라게 만든 것에 대해 여러 번 사과해야 했는데 사실 사과하는 순간에도 속으로는 이건 틀림없이 엄청 웃긴 에피소드가 될 것이라고 낄낄거렸던 것 같다. 




나는 지금까지 산을 한 번도 좋아해 본 적이 없는데 갑자기 산에 와서 살게 되었다. 내가 사는 곳은 등산 마니아들에게 꽤 인기가 있는 월악산 아래인데 정작 나는 월악산 꼭대기인 영봉엔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올해 첫날에 도전해보았지만 반 정도 올라갔다가 구역질을 참으며 내려와야 했다. 가까이 와서 지내보니 나에게 산은 꼭대기를 올라서 정복해야 하는 것보단 계절을 함께 보내며 변화하는 존재로 자리하는 것 같다. 


나는 감정 기복이 심해 뭐든 할 수 있을 것처럼 힘이 넘치다가도 금세 세상을 완전히 등진 사람처럼 무기력해져 버린다. 그럴 때 산의 변화를 생각한다. 어제까진 온 세상을 다 덮어버릴 것처럼 울창하던 산이 오늘의 비바람에 잎사귀가 떨어지고 줄기가 꺾이기도 한다. 그러다 해가 뜨면, 비바람을 버텨낸 잎사귀를 반짝이고 어제의 나를 축 처지게 만든 빗물을 흡수하여 더 자라난다. 감정 기복에 대한 지나친 합리화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나는 그런 것에서 위로를 받는다. 산악지역은 기상예측이 더욱 어렵다고 했는데 그럼 지금 내 마음은 아주 깊은 산속에 있나 보다, 하면서 지나가길 기다린다. 


산에 무지개 요정이 떴다


산 아래에 와서 산 지 벌써 1년 하고도 반이 지나가는데 나는 계속해서 이 변화무쌍한 산에 적응하는 중이다. 나는 여전히 바다에 가고 싶다고 자주 생각한다. 바다에 가서 실컷 놀다가 내가 사는 산 밑으로 돌아와 풀내음에 푹 잠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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