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디페렌테'(다른 삶) 13
모리스 디페렌테 Moris Diferente. 동티모르의 2개 공용어 중 하나인 테툰어로 '다른 삶'이란 뜻이다.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 발리섬 아래쪽, 호주의 위쪽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다. 근 5백 년에 가까운 식민지에서 21세기 초 독립한 나라로, 한국에는 상록수 부대 파견지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곳은 내가 2013년부터 일하고 생활한 곳이자, 가족을 꾸린 곳이기도 하고, 서로 다른 삶들에 대해 무척 많이 생각하게 되는 곳이다. 낯선 땅, 다른 삶, 이상이 현실에 부딪치는 순간순간의 일들을 여기 기록한다.
내가 일했던 단체서 2008년부터 계속 실시해 오고 있는 "가축 함께 기르기" 프로젝트는 주로 바우로면과 소루면 2개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5년이 넘어가니, 해당 면들에 어느 정도 지원이 되어 지역을 확대할 타이밍이 왔다. 한편으론, 그간의 운영 시스템 상 개선할 부분을 새로운 곳에서 한 번 시도해보고자 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예컨대 마을 이장님에게 일방적으로 명단을 받아 참가멤버를 선정하는 방식을, 마을 전체 주민 대상으로 공표한 후 소득 및 현 상황 등을 기준으로 심사해서 선정하는 방식으로 바꾼다던가, 기존 그룹 대비 그룹 내 교육이나 자치 활동을 강화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바꿔갈 계획!
하지만 아무리 의도가 좋고, 주민들도 대체로 협조적이라 하더라도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기존 방식과 다른 방식을 시도하면 자칫 오해가 생길 수도 있다. 또 타성에 의한 자연스러운 저항감이나 좌절이 생길 수도 있다. 해서 “새 술은 새 부대에”! - 새롭게 바꿀 시스템은 새로운 지역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후보지 중 하나인 호메면 면장님을 우선 만나기로 했다. 사실 라사면 면장님이 먼저 약속이 되었는데, 장례식에 가야한다고 하셔서 급 취소가 되었다. 처음에는 장례식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덜컥했는데,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워낙 참석해야 할 장례식과 전통의식이 많다.
호메면 면장님은 사무실에서 5분 거리에 살고 계셔, 나, 현지인 직원, 한국인 직원, 셋이서 다같이 걸어갔다. 면장님은 키 크고 심각한 인상의 50대 중반 정도되어 보이는 분. 외국인 둘을 고려해 천천히 또박또박 이야기를 해 주시고, 전체적으로 매사가 매우 심각하지만 가끔 농담도 하실 줄 아는 분이다. 한국 군대 (상록수부대)있었던 시절을 기억하신다며 기강이 엄격한 데에 감탄했다고 하신다.
호메 면에 대한 전체적인 정보 및 프로젝트에 대한 수요, 가축 사육 현황, 정부나 타 NGO 사업 여부 등등을 여쭤 봤는데, 면장님 캐릭터가 약간 “배가 산으로 가는” 캐릭터시다. 친절하시고, 점쟎고, 협조해 주려는 태도는 있는데, 약간 질문과 대답이 따로 노는 느낌이다.
“…그럼, 면장님, 주민들이 가축을 사려면 아무래도 목돈이 좀 필요할텐데… 이럴 때 어떻게 하나요? 이웃이나 친척한테 빌리나요? 이자는 혹시 얼마 정도인지..?” (향후 마이크로크레딧 프로젝트를 할 수도 있으니, 현황 및 수요 조사 차원 차 질문)
“우리 티모르에선 말이지, 돼지가 아주 중요해. 친척간에 장례식이나 큰 행사가 있으면 돼지나 소 같은 동물과 함께 타이즈를 보내지. 나에게 그런 일이 생겨도 마찬가지야. 나에게 또 그렇게 보내주지. 티모르에서는 그렇게 서로 돕는 거지.”
“…(아니, 면장님, 저희도 그건 아는데… 뭔가 살짝 빗나간 듯…) 그렇게 돼지가 필요할 때 없으면 사게 되쟎아요. 그런데 돈이 없어서 이웃한테 돈을 빌리게 되었어요. 그럼 이자를 주어야 하나요?”
“옛날에는 이자라는 것이 없었어. 우리 티모르에서는 (다시 아까 한 얘기 반복)”
...
어쨌거나 그럭저럭 질문과 대답과, 문화 강의를 오고 가며 대충 이야기를 끝내긴 했다. 어차피 자세하고 세부적인 현지 사정은 직접 마을을 들어 가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니, 면장님과 얼굴을 트고 우리 프로젝트에 대한 안내를 했다는 것으로 만족해야지. 게다가 면장님 말씀으로는, 유사한 프로젝트를 한 적은 없다고 하니 일단 기본 조건은 된 셈이다. 직접 마을을 방문해서 마을 사정을 보고, 프로젝트 실현 가능성을 요모조모 따져 보는 것은 이 다음 단계의 일이 될 테다.
그 다음주엔, 나머지 2개 면의 면장님을 만나 뵈었다.
오전에는 라싸 면 사무소로 면장님을 찾아 갔다. 유럽연합에서 펀딩을 받아 포르투갈 NGO인 Medicos do Mundo에서 건물 조성을 지원을 했나보다. 후원자 표기를 한 명패가 붙어 있고, 다른 면 사무소 대비 상태가 괜찮다. 비 새는 곳도 없고, 넓직하고, 안에는 TV도 있다. 한 10분 정도 기다리다가 만나 뵌 라싸 면장님은 짧은 하얀 머리를 하신, 웃는 인상의 60대 정도 되신 분이다. 나중에 들어보니 우리 현지 직원분들 두 분의 옛날 학교 선생님이셨다고. 교직에 계시다가 면장님을 하시게 된 것이다.
우리 프로그램의 취지를 설명드리고, 지역 내 돼지 수요, 급전 수요, 돼지 사육 현황 등에 대한 질문을 드렸다. 돼지 수요야 여기 어딜 가나 다 비슷하게 많고, (전통의식과 잔치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많이 쓰이는 동물이다), 돼지 사육에 대한 모습도 거의 비슷하다. 반 정도는 축사를 짓고, 반 정도는 방목을 하는데, 실종 혹은 도난의 위험이 있어도 방목을 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먹이 때문이다. 축사를 짓는 방법에 대한 교육은 축산부에서 많이 실시하고, 축사 재료도 어떻게 구한다. 하지만 일단 축사 안에 돼지를 넣어 두면 끼니를 다 챙겨 주어야 한다. 이곳은 아직 Hungry Season이 있다. 그땐 사람이 먹을 것도 부족한데, 이럴 때는 돼지 먹이를 못 챙겨 줄 수 밖에 없다고. 그러면 그냥 방목을 해서 돼지가 알아서 찾아 먹도록 해야 한다. 안정적인 양돈과 생산성 증대는 아무래도 축사에서 안전하게 두고 지속적으로 먹이를 공급하는 것과 관련이 큰 데, 먹이 부분이 해결이 안 되니, 아무리 정부에서 축사를 지으라고 해도 실행이 제대로 안 될 수 밖에.
돼지를 구입하거나 가족 행사가 있다거나 등 목돈이 필요할 경우에 돈은 어떻게 마련하느냐는 질문에도 면장님들 대답이 다들 비슷하다. 가까운 친척이나 이웃으로부터 돈을 빌리는데, 가까운 친척일 경우에는 이자가 없고, 나머지 경우 보통 10% 선을 쳐서 다시 갚는다고. Local NGO인 Moris Rasik 에 대한 원성어린 이야기 역시 어딜 가나 듣는 편이다. 마이크로크레딧을 실시해 처음에는 호응이 좋았는데, 20%에 달하는 높은 이자, 게다가 매주 상환을 받으러 와 독촉을 하는 통에 주민들로부터 영 원성을 산 모양이다. 척 들어도 20% 이자는 너무 높은데,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기획을 했는지 모르겠다.
라싸 면장님께서는 교사로서의 오래 경험과 나이에서 우러나오는 내공이 무시할 수 없는 분으로, 대화의 주도권을 자연스럽게 쥐고 들었나 놨다 하신다. 그렇다고 어떤 불쾌한 느낌은 아니다. 기분좋게 에너지 넘치게 자기 입장을 확실히 잘 어필하면서도,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다. 역시 인터뷰를 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절대 쫄지 않고, 너무 경직되게 상대방의 질문에만 반응해서도 안되고, 지나치지 않은 선에서 확실하게 자기의 입장을 어필하되, 이를 기분좋고 유쾌하게 풀어갈 수 있어야 한다.
“당신네 단체 프로그램 참 좋네. 이런 컨셉 맘에 들어요. 우리 면에 들어왔으면 좋겠네. 하지만 올해 연락 안 온다고 해도 섭섭해 하진 않을께. 허허허허” 삘의 멘트를 자연스럽게 던지는데, 치고 빠지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셨다.
그날 오후에 만난 레우로 면장님은 이제 갓 서른이 되신 젋은 면장님. 성실하고 근면한 모범생 스타일로, 구사하는 포르투갈계 어휘나 말의 속도로 보건데, 딜리서 공부를 하신 게 아닐까 추측하게 되는 분이셨다. 인상 좋고 착하게 생기신 분이셨는데, 아직 나이나 경력이 라싸 면장님의 짬밥에는 감히 못 미치셔서 상대적으로 임팩트가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물론 면장님 개인의 개성을 보고 우리가 지역 선정을 하는 것은 아니다. 모니터링을 위해 사무실에서 현실적으로 오고갈 수 있는 거리 (호메, 라싸, 레우로 3개 거의 다 엇비슷)와 기존 정부나 타 NGO의 지원이 있는지 여부, 면장님들의 사업에 대한 이해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면을 선정한 후, 해당 면 내 마을을 추천받아 다시 세부적으로 선정하는 작업을 거칠 것이다.
사무실에서의 거리, 타 지원 여부와 같은 객관적 조건이 비슷할 경우는 아무래도 면장님과의 인터뷰가 (사업에 대한 이해도와 협조 의지 등) 많이 좌우하게 될 텐데, 함께 간 현지직원과 한국인 직원, 나까지 모두 라싸면을 선호했다. 세 분 다 기본적으로 호의와 관심을 보여주셨으나, 제일 명확하게 우리 사업의 취지를 이해하고 적극적인 의사 어필을 한 것은 라싸 면장님이셨으니깐 말이다. 게다가 이곳처럼 한 지역에서 계속 살아가면서 서로를 잘 알게 되는 좁은 커뮤니티의 특성 상, 평판이라는 부분도 무시할 수 없다. 두루두루 들어보니, 라싸 면장님은 꽤 존경을 받으신다고. 자세한 것은 심사과정표에 따라 객관적으로 진행될 것이지만, 면장님 임팩트만으론 라싸면이 우세!
개발협력현장에서 주민들과 협력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주민들과 만나는 시간은 제일 힘을 받는 시간이다. 출발선부터 우리의 일방적 지원이 아니고 함께 사업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참가자의 의지와 공동 부담이 중요하다는 부분을, 생각보다 당연하게 받아들여 주셔서 다행이다 싶었다.
독립 직후 동티모르에 외부 원조가 급격하게 늘어, 10년이 넘어가는 동안 사람들이 외부 원조 프로그램에 많이 익숙해진 부분이 분명 있다. 하지만 그렇게 경험치가 많은 만큼, 일회성 현금지원이 효과를 내지 못한다는 것도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 해서 자신의 금전 부담이 좀 있더라도, 초반부터 조금이라도 함께 책임의식과 주인의식을 가지고 갈 수 있는 프로젝트가 더 지속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단순한 명분 차원이 아닌 실제로 작동하는 매커니즘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는 편이다. 타 지역, 타 주민들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우리와 함께 일하는 이곳 주민들은 이런 부분을 많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편이다. 더디 가더라도, 그렇게 공들인 시간과 노력이 결국에는 고스란히 여기 사람들 사이에 남는 실한 프로젝트가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