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쿠 다 가마, 모험가-애국자-학살자 02
Portugal, Português! 포르투갈, 포르투게스!
낯선 장소에서 이국적인 음식을 맛보고 생경한 풍경에 감탄하는 것은 여행자의 즐거움입니다. 하지만 제일 생생한 것은 역시나 사람들의 이야기죠.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와 역사를 알게 된다면, 경험은 더 풍부해지고 시야는 다양해질 수 있습니다.
한국과는 서로 유라시아 대륙의 끝과 끝에 위치한 먼 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고 있는 나라, 포르투갈에 대한 '한 꺼풀 더'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역사 속 사람들의 이야기를 스토리텔링식으로 전합니다.
1편에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njj0772/133
머지않아 인도 캘리컷에 도착한 다 가마는 이전 교역소 학살에 대한 배상과 사죄를 요구했지만, 자모린Zamorin 왕은 이를 거부했다. 협상이 실패하자, 그는 곧바로 캘리컷 항구와 도심을 포격했다. 나포한 캘리컷 상인 38명을 교수형에 처한 뒤, 시체를 손발이 묶인 채 바다에 던져버리는 잔혹한 연출도 감행했다. 자모린 왕에게 보내는 경고의 표시였다.
캘리컷의 항구에 있던 무슬림 상선들을 약탈하고 불태운 다 가마는 포르투갈의 교역 거점인 코친Cochin으로 이동, 현지 왕국과 연합하여 캘리컷의 해상 교역망을 파괴하는 해상 봉쇄 작전을 감행했다.
"왕이시여! 귀하가 지난번 우리 포르투갈 신민들을 학살한 것은... 어쩌고 저쩌고... 하지만 우리가 관대히 여겨 함께 동반자 관계로... 어쩌고 저쩌고..."
"(우리가 굳이 왜???) 하~~흠~~ 아직 멀었느냐~~~?"
라는 대화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협상이 실패하자 바로 무력행사가 시작되죠.
하지만 자모린은 여전히 포르투갈의 패권 인정을 거부했다. 캘리컷은 오랜 세월 동안 아랍 상인들과 번영을 누렸던 국제 무역 중심지였기 때문에, 외세의 강압적 통제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계속되는 포르투갈의 군사적 압박과 항구 봉쇄는 캘리컷의 무역력과 국제적 위상을 점차 떨어뜨렸다. 또한 캘리컷의 무역 독점을 견제하고 싶어 했던 지역 세력들인 코친Cochin, 칸누르Cannanore 등은 포르투갈을 견제 동맹으로 활용하려 했다. (상호 윈윈을 노린 셈!) 코친은 포르투갈에게 요새 건설을 허용했고, 이는 1503년 포르투갈 최초의 인도 요새인 포트 엠마누엘Fort Emmanuel로 이어졌다.
다 가마는 캘리컷에서는 무력시위, 코친에서는 외교와 교역이라는 이중 전략을 구사했고, 결과적으로 포르투갈의 인도 진출은 안정적 기반을 얻게 된 것이다.
다 가마가 귀환한 1503년 당시, 선박 한 척당 실은 후추의 양은 약 300톤에 달했다는 추정도 있으며, 이는 당시 유럽 연간 수입량의 상당 부분에 해당한다. 당시 후추, 계피, 정향, 육두구 등은 유럽에서 금값에 맞먹는 고가로 팔렸으며, 1504년 포르투갈의 전체 무역 수익 중 80% 이상이 인도산 향신료에서 나왔다는 기록도 있다.
이전까지 향신료는 무슬림 상인들이 중개한 베네치아를 통해서만 유입되었지만, 다 가마의 항로 개척으로 포르투갈이 직접 수입을 시작하면서 유럽 시장의 향신료 가격이 점차 안정되게 된다.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의 중개무역 독점에 타격을 주었고, 포르투갈의 리스본이 새로운 향신료 교역의 중심지로 부상하게 되었다.
다 가마는 왕실로부터 영지를 하사 받고 (Count of Vidigueira) 상류 귀족 사회에 편입된다. 하지만 1505년 초대 인도 총독으로 프란시스쿠 드 알메이다Francisco de Almeida가 임명되면서, 다 가마는 점차 정계에서 멀어지게 된다.
시간이 흘러 새로 즉위한 왕 주앙 3세는 다 가마의 경험을 다시 평가했고, 1524년 결국 인도 총독으로 재임명된다. 그러나 인도 도착 직후인 1524년 말, 고아Goa에서 병으로 사망하며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게 된다.
저희 집 옆동네가 그 옛날, 바스쿠 다 가마가 영지로 받은 비디게이라입니다. 마을 한가운데는, 한때 학교였던, 지금은 생활사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는데 그 앞에 바스쿠 다 가마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인도 발견자이자 인도양의 제독, 1대 비디게이라 영주, 인도의 부왕 (vice rei)
이라고 적혀 있네요. 인도인들이 봤더라면 그야말로 경을 칠 일이겠으나, 포르투갈 입장에선 생각이 다르겠죠. 한국-포르투갈을 골고루 물려받은 우리 애들이 학교에서 역사를 배울 무렵엔, '이 사람은 용감하고 똑똑하고 운이 좋았던 영웅이자 항해가였지만, 잔인한 일을 저지른 침략자이기도 했다'는 것을 균형 있게 알려주고 싶네요.
아랍 상인들이 수세기 동안 독점해 온 향신료 무역에 유럽인이 직접 진입하게 된 것은 큰 수확이었다. 항해를 통해 인도양의 바람 주기, 무슬림 상인의 상권, 인도 내부의 정치 구도 등 후속 항해에 결정적인 정보가 축적된 것 역시 큰 소득이었다. 다 가마의 항해는 마누엘 1세에게 큰 정치적 승리를 안겨주었으며, 포르투갈이 해상제국으로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다.
이러한 바스쿠 다 가마의 항해는 단지 현실의 바다를 건넌 것이 아니라, 신화와 문학의 영역으로도 이어졌다. 포르투갈의 국민 시인 루이스 드 카몽이스는 서사시 Os Lusíadas에서 다 가마의 항해를 중심 서사로 삼는다.
"Este é o grão Capitão que a Fé divina
Ensina a descobrir terras incógnitas..."
(“이 위대한 선장은 신의 뜻을 따라, 알려지지 않은 땅을 발견하는 자다.”)
하지만 인도에서는 다 가마를 다르게 기억한다.
다 가마의 도착 이후 포르투갈은 인도에서 점차 군사적 지배와 종교적 강요를 강화했으며, 때로는 현지 상인을 강제로 억압하고, 무력 충돌도 서슴지 않았다. 무슬림 순례자들이 탄 배를 불태우는 등의 잔혹한 행위는 현재 시각에서 보면 전쟁 범죄다. 다 가마의 대항해는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역사 속에서
- 바스쿠 다 가마의 첫 인도 항해(1497–1499)는 단순한 모험이 아니라 포르투갈 왕국이 전략적으로 조직한 대규모 원정이었기 때문에, 선단 구성, 장비, 선원 명단, 무기류, 식량 등 관련 정보가 당대 기록과 후대 연구자들의 정리에 의해 비교적 잘 전해져 있습니다.
총 4척의 선박에, 약 170명의 선원이 승선했습니다. 항해사, 선장, 통역사, 사제, 의사, 목수, 포수, 병사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일부는 이전 원정 (바르톨로메우 디아스)에 참여했던 베테랑들이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출항 전에는 페루 다 코빌랴웅Pêro da Covilhã과 같은 포르투갈 간첩이자 정찰원이 육로로 인도와 아라비아, 아프리카 동부 지역을 여행하며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했지요. 인도 서해안 항구의 위치, 현지 무역 품목, 무슬림 상인의 항로 정보 등은 포르투갈 궁정에 비밀리에 보고되었고, 바스쿠 다 가마의 항해 계획에도 참고가 되었죠.
(Diffie, B. W., & Winius, G. D. Foundations of the Portuguese Empire, 1415–1580.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77. / Subrahmanyam, S. The Career and Legend of Vasco da Gama.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7. / Disney, A. R. A History of Portugal and the Portuguese Empir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 인도에서는 바스쿠 다 가마의 도착이 단순한 항해가 아니라, 포르투갈의 식민지 야욕의 문을 연 사건으로 간주됩니다. 이 항해를 기점으로 포르투갈은 곧 고아Goa (1510), 디우Diu (1535), 다만Daman (1559) 등 인도 서부 해안 지역을 식민지화합니다. 인도 내 학계에서는 바스쿠 다 가마를 “개척자”가 아닌 “포르투갈 제국의 침략 사령관”으로 보는 시각이 있고, 인도 언론은 매년 5월 20일(바스쿠 다 가마 도착일)을 맞아, 그의 도착이 ‘식민 침략의 시작’이라는 내용의 기사가 나오기도 하죠. 서로 다른 두 세계의 만남이 다양한 교류의 spark가 되었다는 시각과, 식민주의를 옹호하는 기념은 거부되어야 한다는 시각이 공존합니다.
- 다 가마의 흔적 : 리스본 벨렝 지역의 (에그타르트 유명 맛집이 있는 곳과 가깝습니다) 유명한 상징물, 발견기념비Padrão dos Descobrimentos - 그 정중앙에서 망망대해를 응시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바스쿠 다 가마입니다.
테주 강을 가로지르는 현수교 이름도 ‘바스쿠 다 가마 다리Ponte Vasco da Gama죠. 유럽에서 가장 긴 이 다리는 1998년 엑스포와 함께 개통되었고, 다 가마의 인도 항로 개척 500주년을 기념해 붙여졌습니다.
리스본 동쪽의 오리엔트 역에 있는 큰 쇼핑몰 이름 역시, 바스쿠 다 가마 센터Centro Vasco da Gama입니다.
유로를 쓰는 지금은 없어진 포르투갈의 예전 화폐 에스쿠도 - 50 에스쿠도 동전에도 바스쿠 다 가마가 새겨져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