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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을 넘어 살아있는 시인

언어의 조각가, 국민 시인 까몽이스 02

by 마싸

Portugal, Português! 포르투갈, 포르투게스!

낯선 장소에서 이국적인 음식을 맛보고 생경한 풍경에 감탄하는 것은 여행자의 즐거움입니다. 하지만 제일 생생한 것은 역시나 사람들의 이야기죠.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와 역사를 알게 된다면, 경험은 더 풍부해지고 시야는 다양해질 수 있습니다.

한국과는 서로 유라시아 대륙의 끝과 끝에 위치한 먼 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고 있는 나라, 포르투갈에 대한 '한 꺼풀 더'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역사 속 사람들의 이야기를 스토리텔링식으로 전합니다.


https://brunch.co.kr/@njj0772/143

1편에서 이어집니다.




언어의 조각가, 국민 시인

까몽이스는 바다에서 언어를 단련했다. 그가 완성한 서사시 '루지아다스Os Lusiadas'는 단순한 모험담이 아니라, 포르투갈어의 조각상이었다 - 라틴어의 고전적 구조, 민중어의 리듬, 바다의 이미지가 한데 얽혀 새로운 질서를 만든 것이다.


그의 시대 전후,
이탈리아의 단테가 (1265~1321) 이탈리아어를,
영국의 셰익스피어가 (1564~1616) 영어를,
스페인의 세르반테스가 (1547~1616) 스페인어를 세웠듯이,
까몽이스는 포르투갈어를 세웠다.


“Camões 이후의 포르투갈어는, 그 이전과 전혀 다른 언어가 되었다.”
— António José Saraiva, História da Literatura Portuguesa


그는 문법과 어휘를 통합하고, 포르투갈인의 영혼을 언어로 새겼다. '루지아다스'는 단지 한 나라의 대서사시가 아니라, 한 언어를 자리매김하게 했다.



귀환과 마지막 시

인도와 마카우에서도 가난과 갈등은 그를 따라다녔다. 부패한 관리와의 마찰로 여러 차례 투옥되기도 했고, 결국 마카우에서는 관리직에서 쫓겨난 뒤 귀국 명령을 받는다.

귀로는 긴 여정이었다. 한 번은 현재의 캄보디아 또는 베트남 인근 해상에서 배가 난파되기도 했다. 그는 끝까지 '루지아다스'의 원고를 높이 들어 물에 젖지 않게 했다. **


História_de_Lisboa,_por_Nuno_Saraiva_(Arco_da_Rua_Norberto_de_Araújo)_10.png Panel of the "History of Lisbon" mural, by Nuno Saraiva (Arco da Rua Norberto de Araújo)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Hist%C3%B3ria_de_Lisboa,_por_Nuno_Saraiva_(Arco_da_Rua_Norberto_de_Ara%C3%BAjo)_10.png < Wikimedia Commons
"가라앉아도 원고만은 놓지 않으리...!!!" - 그림 가운데, 손과 원고만 보이는 까몽이스



항해 끝에, 그는 다시 리스본으로 돌아왔다. 제국은 이미 기울고 있었다.

그를 기다린 것은 명예가 아니라 가난이었다. 그는 친구의 도움으로 근근이 살았고, 가끔 시를 팔아 술값을 마련했다.

1580년, 포르투갈은 스페인에 병합되었다.
그해, 그는 리스본의 좁은 골목방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친구 페레이라가António Ferreira 전하는 바에 따르면, 가난 속의 쓸쓸한 죽음이었다. '루지아다스'로 조국의 영광을 찬양했지만, 아무런 보상과 위로도 주지 않았던 조국은, 까몽이스가 숨을 거두던 그 해, 함께 사라졌다.


“Enfim acabarei a vida e verão todos que fui tão afeiçoado à minha Pátria que não só me contentei de morrer nela, mas com ela.”
"이제 내 생을 마치리라. 모두 알게 되리니, 내가 내 조국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 단지 그 땅에서 죽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조국과 함께 죽고자 했다는 것을.”


그는 조용히 잠들었고, 그날이 ‘포르투갈의 날’이 되었다 - 한 인간의 종말이 아닌, 한 언어의 완성으로 남았다.



여전히 살아 있는 시인

400년이 지난 지금도, 포르투갈의 모든 학생은 '루지아다스'를 배운다.


Tapa_de_Los_Lusiadas_de_Luys_de_Camoes.jpg '루지아다스'의 스페인어 번역본,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제 포르투갈 가족과 친구들 모두 한 구절 정도는 암송할 수 있는 '루지아다스'입니다. 학창 시절에 머리에 쥐 나게 배웠다네요. 하지만 고어와 문학적 비유로 가득 차서, 제대로 처음부터 읽은 사람은 고사하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라는 것이 대다수의 코멘트죠. 한국인에게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하여...'와 비슷한 느낌일까요? 첫 구절과 중요성은 알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사람은 잘 없는...


고리타분하고 어렵다는 학생들의 불만을 들을 때마다, 선생님은 말할 것이다.

“그 오래된 말속에 네가 살고 있단다.”

그는 언어 그 자체이며, 조국의 영혼이자 기억이다.

포르투갈 사람에게 까몽이스는 ‘읽히는 시인’이 아니라, ‘살아 있는 문장’이다.




역사 속에서

포르투갈어는 중세 갈라이코-포르투게스(Galaico-Português)에서 발전한 언어죠. 12~15세기까지는 지역마다 문체나 철자, 문법이 통일되지 않은 상태였고, 종교시·궁정가요가 주를 이루던 '중세 시기' 언어였습니다. 그런데 까몽이스는 '루지아다스'를 통해 언어적 표준과 문체적 품격을 확립했습니다.

라틴어·스페인어 혼용, 지역별 차이가 큰 어휘를 포르투갈화하고,

종교적·궁정가요 중심의 문체에서 국가적·철학적 주제를 다루는 고전적 언어체계로 확립하고,

10음절, 교차각운 등 정교한 음률체계를 정착시키죠.

그래서 포르투갈 문학사에서는 그를 흔히 “포르투갈어의 창조자(O criador da língua portuguesa literária)”라고 부릅니다.


까몽이스 전후 및 동시대의 유럽 각 언어에서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 문인들이 있죠. 단테는 라틴어 대신 민중어(Volgare)로 고급 서사시를 써, 현대 이탈리아어의 기초를 형성합니다. 셰익스피어는 영어 어휘·표현을 폭발적으로 확장(신조어 1,700개 이상)시키며 영어의 연금술사로 불렸죠. 세르반테스는 근대소설의 문체를 확립하고, 스페인어의 표현세계를 극대화했습니다.

이들처럼 까몽이스 역시, 자국의 언어를 단순한 통속 언어에서 문학과 철학의 언어로 승화시킨 인물입니다. 단순한 문학적 인물을 넘어 언어·문화·국가 아이덴티티의 원형이 되는 인물이죠.


Camoes-salvando-os-lusiadas-a-nado.jpg 1924년 발행된 우표,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


바다에 빠져서도 놓지 않는 원고. 이 장면은 거의 성화처럼 그려진 전설입니다. 공식 문헌에서는 “난파로 원고를 구했다”는 직접 기록은 없습니다. 하지만 까몽이스의 편지와 동시대 기록들(특히 1570년대 리스본 검열청 보고서)에 그가 “해외에서 오랜 세월 떠돌며 시를 완성했다”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암시적인 표현이 후대에 ‘드라마틱한 장면’으로 확대된 것이죠. 이 장면은 이후 18~19세기 낭만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포르투갈 문학의 신화적 모티프’로 굳어집니다. 그리고 후대의 기념물·미술(동상, 메달, 삽화)과 기념판본들이 그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확산시켰습니다 - '시인의 헌신’과 ‘언어 구원’이라는 상징을 전달하는 강렬한 신화적 모티프가 된 거죠.

Muralismo_fadista_-_59_(12061919883).jpg Muralismo fadista - 59 r2hox from Madrid, Spain, Wikimedia Commons


https://www.uc.pt/person/universcidade/univercidade/urbanidade/luis-vaz-de-cam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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