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속의 계몽 독재자, 마르케스 폼발 01
Portugal, Português! 포르투갈, 포르투게스!
낯선 장소에서 이국적인 음식을 맛보고 생경한 풍경에 감탄하는 것은 여행자의 즐거움입니다. 하지만 제일 생생한 것은 역시나 사람들의 이야기죠.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와 역사를 알게 된다면, 경험은 더 풍부해지고 시야는 다양해질 수 있습니다.
한국과는 서로 유라시아 대륙의 끝과 끝에 위치한 먼 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고 있는 나라, 포르투갈에 대한 '한 꺼풀 더'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역사 속 사람들의 이야기를 스토리텔링식으로 전합니다.
리스본이 갈라진 날
1755년 11월 1일, 만성절Dia de Todos os Santos 모든 성인의 날 아침.
리스본의 하늘은 언제나처럼 고요했고, 도시 곳곳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대성당과 작은 예배당으로 몰려들었다. 향 냄새가 골목마다 퍼지고, 초들이 반짝이는 그 순간— 땅이 갑자기 흔들렸다.
성당 천장이 갈라지며 거대한 돌기둥이 무너져 내렸다.
“신의 진노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소리를 지르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거리도 더는 안전하지 않았다. 대지 전체가 뒤틀리며 리스본이 마치 거대한 바다 위 배처럼 흔들렸다. 집들이 무너지고, 강가에서는 땅이 갈라져 사람들을 삼켰다.
잠시 뒤, 테주 강이 비정상적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밀려온 것은 거대한 파도였다.
불길이 일고, 항구의 유류 창고에 옮겨 붙어 도시 전체를 집어삼켰다.
1755년 당대에 제작된 구리판화입니다. 해일·화재·무너지는 항구가 보이네요.
후대의 지질학적 분석에 따르면 지진의 규모는 대략 모멘트 규모(Mw) 8.5~9.0 사이였습니다. 리스본 시내의 대다수 건물이 붕괴되었고, 수천~수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기록에 따라 약 30,000명~60,000명 이상). 또한 지진 직후 쓰나미가 일어나 해안과 항구 지역을 덮쳤고, 이후 며칠간 대형 화재가 이어졌죠.
이 사건은 한 국가의 수도가 대재난으로 거의 무너졌다는 점에서 유럽사에서 전례 없는 규모였고, 이후 재건 과정에서 나타난 기술적·제도적 실험은 현대 도시·건축·재난관리 연구에서도 중요한 참조점이 되었습니다. 또한 당시 많은 철학자와 신학자들이 “왜 신은 이런 일을 허락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죠. 자연재해에 대한 인식이 근대적으로 바뀌는 계기가 됩니다.
그날 하루 동안, 리스본의 85%가 불탔다. 수만 명이 죽었고, 수도는 사실상 사라졌다.
잿더미 위의 남자
국왕 주제 1세는 충격에 말을 잃었다.
하지만 그 곁에서 냉정하게 명령을 내린 한 인물이 있었다.
세바스티아웅 주제 드 카르발류 이 멜루Sebastião José de Carvalho e Melo — 후일 마르케스 드 폼발Marquis de Pombal (1699~1782)이라 불리게 될 남자다.
“Enterrar os mortos, cuidar dos vivos"
“죽은 자는 묻고, 산 자는 돌보라."
그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리스본을 재건하겠다고 선언했고, 곧바로 물자와 인력을 동원했다. 상하수도, 거리, 건축물의 구조까지 새로 설계했다. 무너진 도시 위에서 그는 “신의 뜻”을 묻지 않았다.
오직 인간의 이성과 질서만이 재난을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리스본 대지진은 유럽 전역에 충격을 주었다. 신앙심 깊은 이들은 “신이 왜 성스러운 날에 수도를 파괴했는가?”라며 절규했고, 철학자 볼테르는 「캉디드」에서 그 절망을 냉소로 비틀었다. 그러나 폼발에게 이 사건은 다른 의미였다. ‘하늘이 아닌 인간의 힘으로 국가를 세울 수 있다’는 계몽의 실험장이었다 - 죽은 자에 대한 애도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살아 있는 이들을 위한 구호와 도시 재건이 필요하다, 재난을 신의 형벌로 머물게 하지 않고, 국가와 사회의 복구로 이끌겠다는 것이 폼발의 관점과 의지였다.
무명의 귀족 아들
폼발은 1699년, 리스본에서 태어났다. 귀족 가문이긴 했으나, 권세나 부는 미약했다.
코임브라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지만, 학문보다는 정치와 인간의 권력 구조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는 야망가였다. 부드러운 말투 뒤에는 언제나 냉정한 계산이 있었다.
군대와 외교를 거치며 그는 ‘무능한 귀족보다 유능한 실무자’로 주목받았다. 런던 대사로 있을 때는 영국의 상업주의와 도시 행정을 눈에 새겼다.
'포르투갈이 살아남으려면 귀족의 명예가 아니라 상인의 계산이 필요하다.'
그의 개혁주의는 이미 그때 싹텄다.
1750년, 새 국왕 주제 1세가 즉위하면서 카르발류는 마침내 정권의 핵심으로 들어갔다.
‘왕은 통치하고, 나는 다스리지.'
재건의 도시, 재설계된 인간
지진 이후, 그는 리스본 재건을 단순한 복구가 아닌 새로운 국가의 실험실로 삼았다. 무너진 바이샤(도심)는 곧 ‘계획도시’로 다시 태어났다. 거리들은 바둑판처럼 정렬되었고, 건물들은 일정한 높이와 구조를 따라 지어졌다.
지진에도 무너지지 않도록 설계된 ‘가이올라(gaivola) 구조’, 즉 나무와 철골이 결합된 내진 건축은 세계 최초의 도시 단위 내진 설계로 꼽힌다.
그는 도시뿐 아니라 사람을 재건했다.
구호, 위생, 세금, 무역, 교육— 모든 것이 그의 손 아래 재편되었다. 그는 국가의 부를 ‘이성적 계산’으로 관리하려 했다. 새로운 공장과 상업 조합을 만들고, 외세 의존을 줄이려는 보호무역 정책을 도입했다.
리스본은 다시 일어섰다.
그러나, 사람들은 속삭였다.
“왕은 어디 있고, 왜 저 남자만 보이는가?”
2편으로 이어집니다.
역사 속에서
대지진 이후 왕은 무엇을 했나?
대지진 당시, 주제 1세D. José I는 미사 때문에 리스본 시내가 아니라 벨렝 근교 (현재의 Ajuda 언덕)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오전에 대지진이 발생하자, 리스본 중심부(바이샤)가 붕괴하고 화재가 연쇄적으로 터졌죠. 왕실 일행은 일단 생존했지만, 왕은 도시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시내는 무너졌고, 하천은 갈라졌으며, 불길이 며칠간 계속되었으니까요.
그는 극심한 충격을 받아 도시와 석조 건물 자체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이후 평생을 ‘천막 궁전(Royal Tent Palace, Real Barraca da Ajuda)’에서 살죠. 궁궐 대신 거대한 천막 군영을 세우고 그 안에서 정무를 봅니다. 대형 천막을 여러 동 세워서, 방처럼 나누고, 가구, 벽 장식, 심지어 샹들리에까지 설치했지요. 일종의 “궁전형 텐트 캠프”인 셈이죠. 그 규모가 얼마나 컸냐면, 외국 외교관들이 보고 “이건 하나의 도시다”라고 묘사했을 정도입니다. 임시 왕궁의 길이가 약 200미터, 내부에는 응접실, 예배당, 회의실, 침실, 하인 숙소까지 있었다고 해요. (천막 궁전은 1794년 화재로 전소되고, 그 자리에 나중에 새로 세워진 것이 지금의 '아주다 궁전Palácio da Ajuda' 입니다)
왕은 극도의 불안 속에서 “누가 나라를 재건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에 직면했죠. 당시 내각에는 귀족 출신 대신들이 많았지만, 다들 판단이 마비된 상태였습니다. 그때 나타난 사람이 폼발입니다.
조제 1세는 신앙심이 깊고 내성적인 왕이었다고 합니다. 대지진이 ‘신의 징벌’이라고 믿는 주변 성직자들 속에서 점점 종교적 공포에 사로잡히고, 반대로 폼발은 합리주의와 계몽주의에 기반한 대응을 추진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왕은 점점 ‘심리적으로는 종교에 의존하지만, 정치적으로는 폼발에게 의존하는’ 상태가 되죠.
왕은 모든 행정적 권한을 폼발에게 위임합니다. 왕명으로 ‘재건위원회’를 설치하고, 실제 정책 집행은 전적으로 폼발이 담당했죠. 왕은 보고를 받는 위치에 있었지만, 결정과 실행은 폼발이 전담했습니다. 예컨대 구호, 방역, 시신 처리, 약탈 단속, 그리고 도시 설계 — 모두 폼발의 지휘 아래 진행됩니다. 사실상 이때부터 폼발이 ‘국가의 실질적 통치자’로 군림하게 됩니다. 나중에 정식으로 후작(Marquês) 작위를 받는 것도, 이 재난 대응의 공로 때문이죠.
https://artsandculture.google.com/story/XwVhvz2FgOoYIw?hl=pt-PT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Marquis-de-Pombal
https://www.historytoday.com/archive/months-past/pombal-and-inquisition-portugal
https://research.unl.pt/ws/portalfiles/portal/42811155/e_JPHv19n1_04.pdf
https://mundoeducacao.uol.com.br/historiadobrasil/marques-pombal.htm
https://arquivos.rtp.pt/conteudos/marques-de-pombal-dois-seculos-apos-a-sua-mor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