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독재자, 살라자르 02
Portugal, Português! 포르투갈, 포르투게스!
낯선 장소에서 이국적인 음식을 맛보고 생경한 풍경에 감탄하는 것은 여행자의 즐거움입니다. 하지만 제일 생생한 것은 역시나 사람들의 이야기죠.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와 역사를 알게 된다면, 경험은 더 풍부해지고 시야는 다양해질 수 있습니다.
한국과는 서로 유라시아 대륙의 끝과 끝에 위치한 먼 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고 있는 나라, 포르투갈에 대한 '한 꺼풀 더'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역사 속 사람들의 이야기를 스토리텔링식으로 전합니다.
1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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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시대 – 도덕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복종
살라자르의 통치는 폭력적 구호보다 ‘도덕적 언어’로 유지되었다.
그는 부패 없는 정치인으로 여겨졌고, 실제로 사적으로 부를 축적하지 않았다. 그의 청렴은 신화처럼 전해졌고, 국민은 ‘착한 아버지’의 보호 아래 있다는 안도감에 젖었다.
그러나 그 도덕성은 복종의 미덕을 강요하는 윤리였다.
“가장 잔인한 폭력은, 옳음을 가장한 침묵으로부터 시작된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한 대사처럼, 그 시대의 도덕은 불의에 침묵하는 것을 미덕으로 바꾸었다.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순종을 가르쳤고, 신문은 국가의 명예를 위해 사실을 감췄다. 그리고 사람들은 침묵 속에서 누군가의 고통을 방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
“A liberdade existe dentro da ordem.”
자유는 질서 안에서 존재한다.
- Salazar 연설, 1935년 10월 28일, Assembleia Nacional - Arquivo Nacional Torre do Tombo (ANTT)
“A obediência é a primeira das virtudes civis.”
복종은 시민적 덕목 중 첫 번째이다.
Discursos, 1930년대 후반, Arquivo RTP / Arquivo Nacional
그의 세계에서는 복종이 곧 질서였고, 질서는 곧 구원이었다.
"복종, 질서! 라떼는 말야...
내 말을 듣게나. 난 다 알지..."
제국의 그림자 – 식민지, 전쟁, 그리고 고립
그의 통치는 ‘포르투갈 제국’을 지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세계는 이미 탈식민화의 흐름으로 가고 있었지만, 살라자르는 끝까지 식민지를 ‘신의 사명’으로 여겼다.
“우리는 문명을 전하는 민족이다.”
1950~60년대, 앙골라·모잠비크·기니에서 독립전쟁이 일어났을 때, 살라자르는 전쟁을 중단하지 않았다. 수만 명의 젊은이가 아프리카로 끌려가 죽었다. 국제사회는 포르투갈을 고립시켰고, 국내 경제는 정체했다. 그의 ‘순수한 제국의 꿈’은 시대를 거스른 환상이었다.
1968년, 그는 의자에서 넘어지며 머리를 다쳤다.
건강은 계속 악화되어 더 이상 정상적인 정부 수반 역할을 할 수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정치에서 물러났고, 1970년 세상을 떠났다. 그때까지도 그는 자신이 구한 나라를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것은, 경제적 낙후와 도덕적 침묵의 유산이었다.
끝나지 않은 야간열차 – 독재 이후의 리스본
권력 이양은 대통령과 보수 엘리트들(내각·군부 일각)의 합의로, 카에타누Marcelo Caetano 같은 ‘살라자르 계열의 후계자’를 선택하는 형태로 이뤄졌다. 카에타누가 총리로 체제를 이어받아 ‘완화된 권위주의(reformist authoritarianism)’를 표방했지만 큰 정치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식민지 전쟁은 계속되어 군 내부 불만은 누적된다.
그리고 1974년 4월, 군인들이 거리로 나왔다. 그들의 총구에는 총탄 대신 카네이션이 꽂혀 있었다.
‘카네이션 혁명’이었다 - 시민들은 울면서 노래를 불렀고, 군인들은 포옹했다.
총성이 없는 혁명, 말과 음악이 돌아온 나라.
시민과 군인의 조화, 비폭력의 상징이라는 카네이션 혁명의 감정이 전해지는 사진이죠.
1974년 4월 25일 오전, 리스본의 레스토라우라도레스 광장과 벨렝·카이스두소드레 일대에서 가게에서 막 일하려던 시민들이—특히 인근 레스토랑과 꽃가게에서— 군인들에게 빨간 카네이션cravo 을 나눠주기 시작했습니다. 왜 하필 카네이션이었나? 카네이션이 그때 포르투갈에서 계절적으로 가장 많이 유통되는 시기(봄)였기 때문이기도 하고, 혁명이 갑작스럽게 일어나 모든 상점이 문을 닫았는데, 유일하게 남아 있던 꽃이 카네이션이었다는 현장 증언도 있습니다.
군인들은 시민이 건네는 꽃을 총구와 총열에 꽂았습니다.
군이 시민에게 총을 겨누지 않고 오히려 꽃을 받아들인 순간, 이 장면이 혁명의 상징이 되었죠. 혁명 직후 포르투갈 언론뿐 아니라 해외 언론(특히 프랑스·영국·미국)이 “Revolução dos Cravos”(카네이션 혁명)이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고, 곧 공식명처럼 자리 잡았습니다. 군이 시민을 공격하지 않았고, 시민이 군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희귀한 혁명'의 감정이 아주 간결하게 상징화된 것입니다.
리스본의 밤은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우린 자유를 되찾았다.”
그러나 오랜 침묵은 깊은 상처를 남겼다. 사람들은 서로를 믿지 못했고, 과거를 말하기를 두려워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는 바로 그 시대의 상처를 탐색하는 모습이 담겨있다 - 독재는 개인을 범죄자로 만들기보다 ‘침묵의 공동체’로 만들며, 그 침묵이 나중에 공동 책임으로 환원되는 과정.
살라자르 이후의 세대가 '자신의 도덕적 언어를 되찾는 과정'이 문학적으로 포착된다.
살라자르는 20세기의 전형적인 독재자이면서도, 다른 의미에서 유럽의 ‘도덕적 실험’이었다. 그의 시대는 인간이 신앙과 질서, 도덕의 이름으로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동시에, 그 시대를 가능하게 만든 그와 함께 침묵한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 그리고 그 반대의 인물 역시 보여준다.
“우리가 잘못된 시대를 살아왔다면, 다시 옳은 언어를 배울 수 있을까?”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울리는 질문은 포르투갈만의 것은 아니다. 폭력이 아닌 도덕의 이름으로 자유를 억눌렀던 시대 — 그 불편한 침묵을 직시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도덕적 언어를 되찾는 첫걸음일지 모른다.
카네이션 혁명, 어떻게 무혈혁명이 될 수 있었나?
1970년 살라자르의 사망은 제도적 약화의 시작이었지만, 카에타노의 ‘완화된 연속’과 체제의 깊은 관성, 식민지 전쟁의 누적적 부담이 결합되어 혁명이 곧바로 오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군 내부 불만과 사회적 압력이 임계점을 넘어 1974년 4월 25일 카네이션 혁명으로 폭발했고, 그 결과 포르투갈은 빠르게 민주화와 탈식민화의 길로 들어섰죠. 카네이션 혁명은 거의 ‘무혈혁명’(사망자 4명, 구조적 충돌 없음)이었습니다. 가장 결정적 이유는 군 내부가 혁명에 동조, 아니 거의 '주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MFA(Armed Forces Movement·군 장교운동)가 주도했는데, 국가 권력 구조의 한 축이 정권을 버리고 시민 편에 선 셈이죠. 진압 병력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피를 흘릴 이유가 사라진 것입니다.
그럼 왜 군이 정권을 떠났냐 - 식민지 전쟁(1961–1974)이 군을 완전히 지치게 했기 때문입니다. 10년 넘게 끝이 안 보이는 전쟁에 동원되고, 젊은 장교들은 진급이 막히고, 포르투갈 경제는 전쟁 비용으로 악화되고...
시민도 군과 충돌하지 않았습니다. 시민들은 총·전차 앞에 꽃(카네이션)을 꽂았고, 군은 시민을 향해 총을 들 이유가 없었습니다. “국민이 적이 아닌, 혁명을 국민과 함께 하는 군”이었기 때문입니다. 독재정권의 비밀경찰 PIDE/DGS가 마지막으로 저항했지만, 군이 압도적으로 지지받았기 때문에 그들의 저항은 고립되었고 큰 충돌로 번지지 않았습니다.
https://en.wikipedia.org/wiki/Carnation_Revolution
https://www.aljazeera.com/features/2024/5/4/no-turning-back-50-years-carnation-revolu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