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동
충동적 선택은 어떻게 지양해야 하는가? 선택의 연속인 인생에 있어서도 그리고 투자에 있어서도 결국 따지고 보면 선택이 전부다. 결과는 하늘에 맡긴다는 말처럼 행과 불행은 포르투나(운명의 여신)가 결정한다. 모든 것을 걸면 모든 행복을 얻을 것이고 또한 모든 불행이 찾아올 수도 있다. 모든 것을 알 수 없는 인간이기에 세계의 이러함은 필연이지만 나의 이렀게 됨은 모르는 만큼의 우연이다.
삶의 모든 것을 잃어 더 이상 선택 할 수 없기 전까지는 인간은 선택을 이어나가야 한다. 그렇기에 더 나은 선택을 위해서는 충동적 선택을 지양해야 한다. 어떠한 의무감, 일종의 자기 절제 없이 포르투나의 총애로만 얻은 성과는 부러워할 필요도 부러움의 대상도 아니다. 존재의 포만감은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정신의 인식만이 충동적 선택으로 인한 실패의 회한이 아닌, 실패도 성공도 긍정할 수 있는 후회 없는 선택을 가능케 해 준다.
'하고 싶다'는 충동의 가장 극적인 양태는 리비도로서 성충동이다. 성충동에 대한 인식론적 사유에 도달한다면 가장 근원적이며 극복하기 힘든 정념으로서 성충동은 모든 충동의 범주를 아우르게 된다. 성충동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는 '사디즘'과 '마조히즘'이다. 불특정 다수 앞에 나섰을 때 느끼는 어떠한 수치심, 발가벗겨진 듯한 느낌 거기서 오는 현기증이 마조히스트가 느끼는 쾌락과 괘를 같이 하는 심리다. 마조히스트는 타자를 자신에게 매를 주는 용구로서 죽어있는 사물로 대하며 타자를 매혹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서 '나'를 매혹하려 한다. 즉 쾌락 그 자체로의 전락을 하며 자기 자신을 낭비하고 싶어 한다.
반대로 상대를 소유하고 싶어 하는 욕망의 극단이 사디즘이다. 인간은 살아 있는 존재이기에 사디즘은 오직 살아있는 정신을 온전히 자기에게 굴종시키고 정복하려 한다. 돈에 대한 갈망도 성충동의 범주안에 들어간다. 완벽히 내 것으로 소유하고 싶은 욕망과 '나'를 매혹시키기 위해 낭비하는 쾌락, 이 둘의 양 극단이 인간의 모든 충동적 선택을 내포한다. 이야기된 트라우마는 더 이상 트라우마가 아니듯이 인식된 충동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충동이 아닐 수 있다. 이제 자신의 인생 가치에 맞게 설정된 목적에 다다르기 위해 아는 만큼의 온전한 자유의지로의 선택만이 남게 된다.
정념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다면 적어도 나를 존재하게 하는 나의 정신을 인식해야 한다. 돈에 관한 일에 있어서도 돈을 소유하기 위한 사디즘적 욕망은 차치하더라도 돈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마조히즘적 쾌락의 낭비에서 벗어나야 한다. 혹여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자기 자신을 버리고 싶은 충동적 심정이라면 인생의 선택에 있어서든 투자의 선택에 있어서든 멈춰 서야 한다. 살아 있는 포르투나는 타자를 죽어 있는 도구로써 쓰려는 자에게 절대 미소 짓지 않는다.
(미국증시는 외부변수로서 긍정적 지표가 전 세계 증시에 선반영 되어 상방 제약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