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였던가.
큰길에서 한 움큼 안으로 들어가 있는 우리 집 골목엔 도라지 향기로 가득했다. 시골을 벗어나 도심으로 들어와 별처럼 많은 꿈이 부풀었던 시절. 별모양처럼 생긴 도라지의 하얗고 푸른 내일이 풍선처럼 피어오르던 때. 그러나 나는 도라지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지 못했다. 방안 바구니에 가득히 담겨있는 생 도라지만 지겹도록 보았을 뿐이다.
파란 시골에서는 제법 부농소리를 듣고 자라왔다, 그러나 서울에 올라와선 도라지 뿌리 같은 조그만 전세방을 겨우 얻어 동생이랑 공부를 하는 입장이었다. 농한기에는 어머님이 올라오셔서 밥을 해주시곤 하셨다. 어머님은 우리를 학교에 보내고 그냥 놀고 앉아있을 수는 없다며 작은 부업거리를 찾아다니셨다. 그래서 찾은 것이 도라지 까는 일이었다. 가까운 시장에서 생도라지를 한 대야를 이고 오시면 밤낮으로 그것을 칼로 쪼개어 산더미만 한 도라지나물로 변신시키는 일이다. 그러면 그것을 시장에 다시 갖다주고 얼마 안 되는 품삯을 받는 일이다. 밤늦게까지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으면 어머니는 받아온 목표량을 채우기 위해 졸린 눈 비벼가시며 그 해진 손을 놀리고 계신다. 옆에서 떡을 써는 한석봉의 어머니가 보였다.
과연 그때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시며 그 많은 도라지를 까셨을까. 당시 생각엔 우리 뒷바라지를 위해 잠을 설쳤다고 여겼지만 이제와 생각해 보니 떨어져 계신 아버지 생각이 더 크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도라지에는 설화가 있다. 혼인을 약속한 낭군을 일생동안 기다리다 결국 돌아오지 않는 그쪽을 보면서 진 자리에 피어난 꽃. 그래서 꽃말도 영원한 사랑이다. 꽃도 님을 기다리며 쳐다보던 별처럼 생겼다. 꽃이 피면 수술 꽃가루는 먼저 터져 날아가버리고 그다음에야 암술이 고개를 내미는 꽃. 결국 한꽃 안에서는 수정이 불가한 꽃. 설화를 닮은 꽃이다. 어머니에겐 기다림으로 가득 채워졌다가 하염없이 터진 풍선꽃이었을지도. 어느 시인의 멍든 가슴 같은 파란 꽃이란 말이 겹쳐진다.
난 지금도 도라지나물을 못 먹는다. 학교에 가면 나와 같이 몇 년을 개근한 반찬. 지겹다, 이골이 났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차라리 어머니 생각이 나서라는 이유라면 합리화가 되어 다시 시도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철수세미로도 벗겨지지 않는 그 맛에 대한 기억은 어쩔 수가 없다. 하물며 그 뒤에 최백호의 노래에 나오는 도라지위스키라는 것도 그 단어 때문에 먹지 않았다. 가끔 기침이나 가래에 좋다 하여 배와 꿀을 섞어 주는 도라지청은 어쩔 수 없이 약으로 먹긴 했지만 말이다.
그 대신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은 비슷한 모양의 더덕이다. 젖이 잘 나오게 하는 젖나무, 모래에서 캐는 인삼이라고 사삼이라고도 불리는 더덕. 도라지 꽃 같은 어머니의 젖이 그리워서일까. 도라지에 대한 기억이 더덕더덕 붙은 때문일까. 고추장을 발라 알맞게 익힌 더덕고추장 구이는 기억의 봉오리를 톡톡 터뜨리기엔 술안주로 그만이다.
오늘도 피리를 꺼낸다. 아리랑에 이어 자연스레 넘어가는 레퍼토리, 도라지 타령이다.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네가 내간장을 스리살살 다 녹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