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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걸침 Dec 22. 2023

너와 한 시간만 이별하자

한 시간, 딱 한 시간만 너 없이 살아보자 했다. 

눈을 감았다. 오로지 들리는 소리에만 의지해보기로 했다. 사방이 고요해졌다. 적막이라는 단어가 순식간에 멀리 파타고니아를 나를 끌고 간다. 흙갈색의 드넓은 평원, 멀리 토레스델 파이네의 세 봉우리가 보인다. 오로지 바람소리와 날아가는 새소리뿐, 외로움과 고독의 차이를 굳이 물을 필요가 없는 곳이다.   

   

갑자기 들리는 카톡 알림음. 놀란 새가 푸드덕 날아간다. 지난번 바다낚시를 갔을 때 걸어놓았던 방울소리. 한 마리 걸린 소리다. 어떤 놈일까. 큰 놈일까, 아니면 중간치일까. 낚싯대를 향해 손을 뻗으려다 갑자기 익숙한 귤내음. 내 방이었다. 한 시간 자제하기로 약속한 실험실이었다. 안 받으니 보이스톡으로 채근한다. 누구일까. 반가운 친구 아닐까. 그럴지도 몰라. 셰익스피어가 말했던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창밖에서 친구가 나를 부르는 소리라고. 나도 모르게 손을 뻗을 뻔했다. 아니야. 참는 거야. 지구상의 수많은 동굴에 가봐. 그 천장에서 내려 뻗은 기다란 석순을 보라고. 일 년에 겨우 1센티도 못 자라는 저 느림을 봐. 그 기둥에 맺혀있는 물방울이 마침내 떨어지는 소리라고 생각해 봐. 어때 시간이 늘어졌지? 카톡이 조용해졌다.      


어제 올린 SNS와 브런치가 궁금해졌다. 몇 개의 좋아요가 귤처럼 매달렸는지, 몇 개의 답글이 토마토처럼 영글었는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서로의 교류가 극히 자연스러운 것 아냐? 뻗어나가는 오른손을 왼팔이 황급히 붙잡는다. 잠깐. 그 생각을 해봐. 브라이스 캐년인지 아치스 캐년인지 갔을 때, 그 높은 암벽에서 수만 년 동안 바위가루가 흘러내리고 쌓여 또 하나의 거대한 산을 이룬 모습을. 그만큼의 시간은 아니라도 이 짧은 한 시간을 못 기다린다는 말이야? SNS에 씨를 뿌린 것으로 만족해 봐. 달린 열매는 나중에 봐도 되지 않을까. 엥? 떨어져 썩을 수도 있다고?      


오늘 아침 손흥민 경기는 어떻게 됐지? 서울의 봄이 천만되는 날짜가? 삼달리 6회 짤을 봐야 할 텐데. 스마트폰 쪽으로 눈이 돌아가다가 헛기침으로 방향을 바꾼다. 그래 이번엔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가보자고. 그 밤에 혼자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봤지. 그런데 조금 있으니 내려다보고 있는 거야. 내가 지구라는 낙하산을 메고 어느 별에 내릴까 찾고 있었지. 저 별에서는 이별의 소식을 알고 있을까. 서로 궁금하기나 할까. 어느 정도 빛의 속도로 내려가면 몇 광년 후에 저 파란 별에 안착할 수 있을까. 한 손에 영원한 시간을 쥐고 다른 한 손엔 무한한 공간을 쥐고 내려가던 그때. 그 정도의 너비로 살아갈 순 없을까. 분을 나누고 초를 나누면 행복해질까. 원자 그 밑으로 가면 불확실성의 물리학이 나오는데. 존재라는 것은 없고 모든 것이 확률일 뿐이라는데. 아니 두 개의 존재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평행우주가 있다는데.   

    

현대무용의 맛을 잠깐 볼 때였다. 두 명씩 짝을 지어주고 한 사람은 눈을 감으라 했다. 고요했다. 옆의 동료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고 뒤로 넘어지라면 넘어져보라 했다. 상대를 믿으라는 것이다. 불안이 극으로 달했다. 넘어질 것 같았고 배신당할 것 같았다. 상대를 믿을 수 있다는 강한 신념이 생긴 것은 얼마 안 된 후였다. 적막한 나를 잡아주는 친구. 그게 누구일까. 꼭 스마트폰이나 미디어라야만 할까. 예전엔 책과 친구와 산책과 여행이 그런 역할을 했다. 지금은 그 모든 것이 미디어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긴 시간과 넓은 공간이 짧고 좁은 블랙홀 속으로 들어갔다.      


따르릉. 한 시간이 흘렀다. 일만 광년 같은 시간이다. 자석처럼 붙어있던 스마트폰. 저만치 조그만 별과의 거리만큼 늘어났다. 서재로 간다. 먼지 쌓인 책 두 권을 집는다. 언젠가 나였던 친구가 밑줄 그었던 글을 다시 읽어본다. 생소하지만 멋진 문장이다. 내가 밑줄로 댓들을 달아 놓은 것이다. 곶감처럼 묵었으나 향기 있는 댓글. 캐년의 흙먼지처럼 켜켜이 쌓인 밑줄.   

   

오늘 쓴 약 한 첩 마셨다. 약효가 빠르다. 아니 느리다. 내 몸이 분리되기 시작했다. 평행우주다. 한 몸은 파타고니아로, 한 마음은 별자리로. 리모컨이 어느 구멍인지 숨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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