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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히빈한스 Oct 07. 2022

일기를 쓴다는 것

일기 쓰세요, 시간 여행을 하고 싶다면.

돌아보면, 시작은 군대였다.

10년도 훌쩍 지난 과거의 날이기에 기억이 흐릿하지만, 그 시작은 분명 군대, 그것도 아주 습했던 이등별 시절의 내무반 가장자리에서였다.


지금의 군대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 때는(마침내 '라떼'를 언급하는 나이가 됐다) 각 사병들로 하여금 매일을 돌아보는 글을 적게 함으로써 건강하고 활기찬 병영 문화를 정착시키겠다는, 매우 그럴싸한 취지로 '수양록'이라는 제목의 일기장(?)을 나누어줬다.

표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포스가 어마어마하다(출처 - 네이버 이미지)

여하튼, 모든 병사들은 그 취지에 따라 매일의 과업이 끝난 후에 각자가 겪은 감정들과 각오 따위의 것들, 이를테면 앞으로 이 까마득한 군생활을 어떻게 잘 헤쳐나갈 것인지,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무엇을 이루고 싶은지에 대한 것들을 깨알 같은 글씨(칸도 매우 협소했다)로 적어야 했었는데, 이게 은근히 고욕이었다.


이등병 시절에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서 겪은 감정이랄 것이 무어가 있겠는가. 고된 훈련으로 녹초가 된 몸뚱이를 이끌고 내무반에 들어오면 정말이지 대자로 누워 쉬고만 싶었는데.


그럼에도 우리는 무언가를 적어야 했다.

하지만 대학입시라는 미명 하에 천편일률적인 교육(그 안에 나의 감정을 돌보는 글을 적는 정규 과목은 내 기억에 없었다)을 받아왔기에 어떠한 '글'을 적는다는 것 자체가 어색했던 내가, 아니 우리가 무엇을 적을 줄이나 알았겠나.

어떤 주제로, 어떤 문장으로 글을 시작해야 하는지 조차도 몰랐던 시절이었다.


수양록을 처음 받았던 날, 동고동락하던 나의 동기가 무언가를 열심히 적는 것을 보고 마음이 조급해진 기억이 있다. 저 녀석은 도대체 뭘 적고 있는 거지. 나도 뭐라도 적어야 얼른 소대장에게 검사받고 조금이라도 휴식의 시간을 가질 텐데... 하는 그런.

흘깃 훔쳐보니 찌개가 어떻고 하는 음식 관련 내용이 아닌가.


나도 뭐라도 써야겠다는 생각에 당장 내가 먹고 싶은 음식들에 대해서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돈까스, 탕수육, 삼겹살, 라면, 초밥, 비빔냉면, 콜라, 미숫가루, 칸초, 몽쉘통통......

글이 아니라, 사실상 단어의 나열이었다.(그럼에도 당시에는 꽤나 진지하게 적었다.)


나열이 끝나고 나니, 소대장은 옆 사람과 방금 적은 글을 서로 바꾸어서 읽어볼 것을 권했다.

이 녀석은 어떤 음식들을 적었을까 궁금했다.


동기의 글은 어머니에 대한, 정확히는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된장찌개를 그리워하는 글이었다.

녀석이 어떤 문장으로 글을 시작하고 맺었는지,

그 안에서 어떤 미사여구를 사용하였으며 그 필력은 어떠하였는지 따위의 것들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녀석의 글은 분명 큰 울림이 있었다.

글을 읽고 나 또한 울컥 나의 어머니가 그리워져 전화를 걸어 당신의 찌개가 그립다고, 휴가 나가게 되면 꼭 맛있게 만들어달라고 말을 할 정도였으니.


다시 돌아보니 그래,

녀석의 짧은 글에서 비롯된 어머니와의 통화를 마친 후 내무반으로 터덜터덜 돌아오던 바로 그 순간이었던 것 같다.

그 순간 내가 느꼈던 감정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그때의 감정이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애써 시간과 정신적 에너지를 들여가며 이 '글'을 적고 있는 태초적 동기임은 분명하다.


아주 감사하게도 그날 느낀 울림의 감정은 단발성의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세월의 흔적을 덧입은 채 내 방구석자리에 남아있다.

모름지기, 일기장은 손글씨로 적어야 제 맛!

휴일 낮, 이렇다 하게 당기는 넷플릭스 영화나 책이 없을 때 나는 줄곧 적어왔던 수양록(이라 쓰고 일기장이라 읽는다)들 중 하나를 골라 소파에 길게 눕는다.

그럴 때 읽는 지난 일기장은 그 어떤 베스트셀러나 스릴러 영화보다도 훨씬 흥미롭다.

조금은 오글거리게 표현하자면, 그 작은 일기장이 나에게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선물해주기 때문이며, 나는 지난 모든 일기장을 손글씨로 적어왔기에 글씨 상태에 따라 그날 그날의 내 기분이 어떠했었는지까지도 꽤나 실감 나게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몰입해서 시간 여행을 하다 보면, 과거의 내가 느꼈던 행복, 기쁨, 성취, 좌절, 슬픔, 권태 등의 감정에 다시 이입 중이던 나는 온데간데없고, 불쑥 허리 배김을 느끼며 불편해진 자세를 고쳐 앉는 현재의 나를 마주하게 된다.

바로 그 순간이 나의 짧은 시간 여행이 끝나는 즉, 일기장을 덮는 순간이다.


일기장을 덮고 나면 일순간 허탈감이라고나 할까, 아니,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얼마간은 붙들고 있고 싶은 종류의 생경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문득, 흥미롭게 읽었던 다자이 오사무의 히트작, '인간실격'을 떠올린다.

위 소설은 오직 순수함만을 갈망하던 여린 심성의 한 젊은이(요조)가 인간들의 위선과 잔인함에 의해 파멸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소설 속 주인공은 절정의 순간에 다음과 같이 자조적인 말을 읊조린다.


"그저, 모든 건 지나가기 마련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에서 살아온 이른바 '인간' 세상에서 단 하나, 진리라고 생각한 건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래, 모든 것은 결국 지나가기 마련이다.

저 일기장 속,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이 괴로웠던 날들도,

영원하길 바랐을 만큼 행복하고 황홀했던 날들도,

모두 지나가 버린 것이다.


다시 또 문득 깨닫는 사실 하나는 일기장을 덮으면서 느꼈던 (얼마간 붙들고 싶던, 더 정확히 말하면 나에게 좀 더 머물러줬으면 하였던) 그 감정의 정체가 바로, 모든 것은 결국 지나간다는 진리를 온몸으로 체감하며 느꼈던 각성이었던 게 아닌가 싶다는 것.


어떠한 경유로든 이 글을 마주하고 있을 당신에게 (아니, 나에게) 새삼 다시 전하고픈 한 마디.


모든 것은 결국 지나간다는 것.

지금 겪고있는 그 무수한 감정들도 결국엔 조그만 당신의 일기장에 고유한 필체로만 남게될 거라는 것.


아, 일기 쓰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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