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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히빈한스 Nov 25. 2021

비움의 미학

요로결석 극복기


새벽 1시.

지친 몸을 침대에 뉘었지만 잠이라는 녀석은 도무지 찾아올 생각을 않고 의식은 점점 명료해져만 간다.

하릴없이 오지 않는 님을 기다리며 불면의 밤을 보내기는 싫었다.

  

'좀만 달리고 오자.'


몸을 일으켜 주섬주섬 잡히는 대로 편한 옷을 주워 입고 근처 공원으로 간다.

고요한 새벽, 공원 트랙에는 라인을 비추는 달빛과 가로등에 굴절된 나의 그림자 둘 뿐이다.

러닝 트랙의 시작점에서 마스크를 벗고 있는 힘껏 숨을 들 이마쉰다.  


차가운 새벽 공기와 은은한 풀냄새, 그리고  저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귀뚜라미 울음소리까지.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마음이 복잡할 때는 달리기가 최고다

평행한 두 개의 트랙 저 멀리 가상의 무한 원점을 찍어두고 전력질주를 한다.

얼마나 달렸을까.

가상의 원점이 실체가 되어 턱끝에 다다랐을 즈음, 옆구리 쪽에 마치 무언가 쥐어짜는듯한 통증을 느낀다.

아득해지는 의식 속에서 이 통증이 갑작스러운 질주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낮에 만났던 의사의 진단에 의한 그것 때문인지 생각한다.


요 며칠간 간헐적으로 왼쪽 옆구리에 통증이 있어왔지만 찰나에 불과한 것이었고 당시에는 나름 견딜만한 고통이라는 생각에(지금 돌아보면 참으로 미련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어리석게도 통증의 원인이 무언지도 모른 채 자연치유를 바랐더랬다.


나의 건강 아니, 나의 몸뚱아리에 대한 오만이었고, 자만이었다.

전일 새벽,

누군가 날카로운 송곳을 여러 개 들고 무자비하게 옆구리를 찔러대는 느낌을 받으며 잠에서 깬다.

아니다, 찔러댄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마치 뾰족한 압정들이 왼쪽 옆구리 안에서 자유롭게 유영해대는 느낌이랄까.

무생물인 압정은 나의 고통을 알리 없으니 그 유영의 무대가 넓어질수록 나의 고통은 배가된다.


이렇게 죽는 건가 싶었다.

기나긴 고뇌 끝에 작성한 버킷리스트의 가장 마지막 항목에 '자다가 고통없이 숨을 거두는 것.'이라고 적은 것이 기억났다.

저런 내용을 버킷리스트에 적는 사람이 있을까

버킷리스트의 반의 반도 채우지 못한 것 같은데, 마지막 버킷리스트라도 이루게 해주시지. 하늘도 무심하다는 생각을 한다.

정신을 차려보니 응급실 병상에 누워 천정을 응시하는 내가 있다.

(그 와중에도 어떻게 119를 눌러 살려달라는 구조요청을 하기는 했나보다.)


강력한 진통제 주사가 간밤 뾰족했던 압정들의 날을 무디게 해 준 모양이었다.

어찌어찌 응급실에서 나와 이 빌어먹을 압정들의 정체를 알아내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초주검이 된 상태로 개인병원을 다시 찾았다.


"요로결석이네요, 요관 쪽에 7mm짜리 돌이 있어요, 통증이 상당하셨을 텐데......"


원인을 알면, 결과가 이해되기 마련이다.

그래, 요 며칠간 옆구리가 아팠던 이유(결과)가 저 7mm짜리 돌멩이(원인) 때문이라는 건 알겠다.

하지만 진짜 원인, 그러니까 저 돌멩이가 왜 내 몸에 저러고 박혀있는 것인지는 아직 모르지 않나.


"물 많이 안 먹죠?"

"많이 마셔요, 늘 텀블러도 들고 다니는걸요

(무려 1.5리터짜리 텀블러라고요!)"


"술 자주 해요? 운동은요?"

"술 거의 안 먹고요, 운동은 자주 합니다.

(클라이밍을 얼마나 열심히 하는데요!)"


의사선생님, 나는 평소에 물도 많이 마시고 , 운동도 열심히 하고, 술도 멀리하는 사람이라고요!


"네, 이런 경우가 있어요. 유전이에요 유전."

유전이라는 그의 말에 할 말을 잃고 만다.


할 말을 잃고 어버버 거리는 나에게 의사는 쇄석술, 그러니까 저 7밀리미터짜리 돌멩이를 충격파를 통해 깨부숴야 한다고 말한다.

환자의 입장에서는 무시무시하게 들리는 이런 말들을 의사들은 아무렇지 않게들 말하곤 한다.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마치 판사와 피고인의 관계

아니, 어머니와 세 살배기 아들과의 관계와도 같다.


상호 동등한 인간이지만 후자는 전자의 말을 거부하기 어렵다.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고요 속 혼돈(쇄석술 진료실은 어찌나 조용하던지, 반면에 충격파 소리는 어찌나 앙칼지던지)의 시술의 시간이 지나고부터 기나긴 인고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의사는 나에게 총 세 가지를 주문했다.

첫째, 물을 많이 마실 것.

(그래, 물먹는 하마가 될게요.)

둘째, 중력에 반하는 운동 이를테면, 달리기를 할 것.

(네, 달리다 죽겠습니다.)

셋째, 술을 마시지 말 것.

(술은 원래 안 마신다고요!)


의사는 위 세 가지의 주문을 그대로 따르면 머지않아 그 압정의 정체를 눈으로 볼 수 있으리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무언가를 이토록 간절하게 기다려봤던 적이 있었던가.


고3, 수능을 치르고 대학 합격 발표를 기다리던 때,

군 시절, 전역을 기다리던 때,

대학 시절, 첫사랑과의 재회를 바라오던 때,

대학 졸업 후, 경찰시험 최종 합격 발표를 기다리던 때,  


돌아보니, 각 시절마다 분명 기다림의 시간들이 존재했다.

다만, 이런 기다림들은 모두 무형적이고 얼마간 추상적인 것들이었지, 손으로 만져지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에 반해, 지금 내가 기다리는 것은 너무나도 명확하고, 구체적이고, 무엇보다 그 '실체'가 존재하는 것이었다.

다름 아닌 내 몸뚱아리 속 조그만 돌멩이.

정정하겠다.

'돌멩이'라는 단어는 왠지 모르게 그 어감 자체가 주는 얼마간의 귀여움 혹은 앙증맞음 따위의 느낌이 있으므로 '압정'이라고 칭해야겠다.


여하튼,

이후 물먹는 하마로 보낸 인고의 3일이 지났고 마침내 나는 그토록 마주하기를 고대하던 압정과 조우했다.

날카로운 단면들로 본인의 존재를 감싸 안은 채, 공격적인 아우라를 풍기고 있을 그의 모습을 예상했건만,

세상 밖으로 나온 그 녀석은 미간을 찌푸려야 그 형태가 가늠될 정도로 작고, 또 미미한 존재였다.


나를 그렇게도 괴롭히던 그 '압정'이라는 존재와의 조우가 기쁘면서도,  

일순간 허탈함을 느낀다.

'고작 요만한 녀석 때문에 그토록 괴로웠다고?'


문득, 채우고 다시 비우는 행위에 대하여 생각한다.

내 인생은 언제부터 무엇으로 채워져 왔나.

그 '무엇'이 '무엇'이든 그것을 담을만한 공간이 부족한 것은 아닌지 성찰해본 시간은 있었던가.

남은 공간의 크기를 고려하지 않은 채, 그저 채우기에만 급급한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니었던가.

무언가를 비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었나.

언젠가 중고서점을 방문했을 때, 미니멀리즘에 관한 책을 앉은자리에서 단숨에 읽은 기억이 난다.

얇지만 흡입력이 상당한 책이었는데 그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나는 미니멀리스트가 되어야겠다고, 하나씩 하나씩 비워나가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더랬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놓인 아주 미니멀한 이 돌멩이를 보면서,

또 누가 줬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명함들, 유통기한이 지난 화장품, 고장난 전자기기, 향이 모두 날아간 디퓨저, 잉크가 모두 말라버린 볼펜들, 언젠가는 먹겠지 하고 방치해둔 냉장고 안 음식들(계속 적자니 한도 끝도 없다)을 보면서,


뭘 그리도 미련하게 꾸역꾸역 끌어안고 살아왔나 싶었다.


위 책의 저자는 비움으로써 삶이 단순해지고 매끄러워지며 윤택해진다고 했는데, 정말 맞는 말이었다.


실제로 내 몸안의 돌멩이를 비워내는 경험, 비움의 대상을 직접 마주하는 경험을 하고 나니 더욱 명확해진다.

 

정말로,

진정으로,

미니멀리스트로서 비워가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시 다짐한다.


꽤나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다시금 비움의 의미를 천착하게끔 해준 조그만 돌멩이 녀석에게도 감사함을 느낀다.


손 뻗으면 닿는 거리에, 물이 가득 들어있는 텀블러를 보며 생각한다.

'돌멩아,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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