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도 훌쩍 지난 과거의 날이기에 기억이 흐릿하지만, 그 시작은 분명 군대, 그것도 아주 습했던 이등별 시절의 내무반 가장자리에서였다.
지금의 군대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 때는(마침내 '라떼'를 언급하는 나이가 됐다) 각 사병들로 하여금 매일을 돌아보는 글을 적게 함으로써 건강하고 활기찬 병영 문화를 정착시키겠다는, 매우 그럴싸한 취지로 '수양록'이라는 제목의 일기장(?)을 나누어줬다.
표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포스가 어마어마하다(출처 - 네이버 이미지)
여하튼, 모든 병사들은 그 취지에 따라 매일의 과업이 끝난 후에 각자가 겪은 감정들과 각오 따위의 것들, 이를테면앞으로 이 까마득한 군생활을 어떻게 잘 헤쳐나갈 것인지,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무엇을 이루고 싶은지에 대한 것들을 깨알 같은 글씨(칸도 매우 협소했다)로 적어야 했었는데, 이게 은근히 고욕이었다.
이등병 시절에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서 겪은 감정이랄 것이 무어가 있겠는가. 고된 훈련으로 녹초가 된 몸뚱이를 이끌고 내무반에 들어오면 정말이지 대자로 누워 쉬고만 싶었는데.
그럼에도 우리는 무언가를 적어야 했다.
하지만 대학입시라는 미명 하에 천편일률적인 교육(그 안에 나의 감정을 돌보는 글을 적는 정규 과목은 내 기억에 없었다)을 받아왔기에 어떠한 '글'을 적는다는 것 자체가 어색했던 내가, 아니 우리가 무엇을 적을 줄이나 알았겠나.
어떤 주제로, 어떤 문장으로 글을 시작해야 하는지 조차도 몰랐던 시절이었다.
수양록을 처음 받았던 날, 동고동락하던 나의 동기가 무언가를 열심히 적는 것을 보고 마음이 조급해진 기억이 있다. 저 녀석은 도대체 뭘 적고 있는 거지. 나도 뭐라도 적어야 얼른 소대장에게 검사받고 조금이라도 휴식의 시간을 가질 텐데... 하는 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