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든든한 내 편

엄마의 김밥

by anego 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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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나는 유난히 입이 짧았다. 그런 나를 위해 엄마는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김밥을 싸는 날이 많았다. 지금이야 흔하디 흔한 게 김밥이지만, 그 옛날엔 운동회나 소풍 가는 날에나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이었다. 언제나 엄마의 김밥 속에는 내가 기암 하는 재료들이 숨을 죽이고 소근소근 내 입 속으로 들어갈 준비를 했다. 봄이면 이상한 풀을 씹는 듯한 봄나물이 내 입 속에서 아삭아삭 되었고, 여름이면 소보로 빵 위의 오돌토돌 한 알갱이 같은 고기 볶음이 목구멍을 간지럽혔다. 가을이면 물컹물컹 대는 알 수 없는 야채들이 도톰한 계란 지단과 함께 등장했고, 겨울이면 바삭바삭한 잔 멸치와 심심한 견과류 등이 입 속에서 톡톡 튀었다. 엄마는 여전히 잠이 덜 깬 채 식탁 위에 놓인 주스 한잔을 겨우 비우고 집을 나서는 나를 씩씩하게 막아 세웠다. 그리고 아침이면 별다른 이유없이 잔뜩 짜증이 나있는 내 얼굴 앞으로 엄마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내밀고, 내 입 속으로 탁구공보다 큰 김밥 한 알을 밀어 넣었다. 고소한 참기름 향이 나는 아직도 밥알이 따뜻한 김밥이 내 입안에 가득 찼다. 한쪽 볼을 불룩하게 부풀린 김밥을 한껏 인상을 구겨가며 꾸역꾸역 씹는 동안, 나도 모르게 오늘도 잘 버터 낼 수 있을 것 같은 든든한 자신감이 생겨났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라는 뜨거운 물에 제대로 준비도 없이 풍덩 뛰어들고 몇 년이 쏜살같이 흘렀다. 가끔은 죽도록 열심히 할 만큼 한 것도 같은데 아무 것도 내 맘대로 안 되는 날이 있다. 마치 이럴 거면 처음부터 시작도 하지 말았으면 좋았을 결과들이, ‘슬픈 예감은 결코 틀리지 않는다’는 말을 명백히 증명이라도 하듯 줄줄이 이어졌다. 주변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아무리 아랫배에 힘을 주고 용을 쓰며 허리를 꼿꼿이 세워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깨는 금새 축 쳐지고 고개는 바닥으로 뚝 떨어뜨린 소심한 겁쟁이가 되고 말았다. 그럴 때마다 난 어김없이 어린시절 엄마가 환한 미소를 머금고 내 입으로 넣어주던 철마다 다양했던 김밥 생각이 났다. 지금 이순간, 그걸 양볼 가득 입안으로 밀어 넣고 목구멍까지 차오른 답답함도, 대답 없는 불안함도, 쌓여 가는 억울함도, 김밥과 함께 힘차게 씹어 삼키면, 그 옛날처럼 힘과 용기가 날 것 같았다.


그땐 몰랐다. 엄마의 김밥은 오늘도 집을 나서는 엄마의 눈에 아직도 한없이 어린 내가 세상 앞에 약해지거나 넘어지지 않고, 꿋꿋하게 버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엄마의 사랑이었다는 것을… 한결같은 엄마의 정성과 마음으로 똘똘 뭉쳐, 나와 나의 하루를 든든하게 응원하던 김밥 - 오늘처럼 이렇게 허기진 날을 위해 조금 더 맛있게 먹을 걸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