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상처는 사라지는게 아니라 덮어지는거라고
내가 가장 후회가 되는 일중 하나를 꼽으라면,
“할머니집에서 1년만 살 수 있어?“ 라는 엄마의 말에 ”아니“ 라고 대답하지 못했다는 거
불안정한 아빠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지만, 딱히 궁금하지 않아 엄마에게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저 엄마가 다시 돌아온것 만으로도 평화로웠던 작은 2층집에서 엄마는 나를 꼭 껴안으며 물었다.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엄마의 제안에 12살의 어린 나이였던 난 빠른 판단이 어려웠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고속버스터미널로 갔다.
버스안에 홀로 타서 창문밖으로 손을 흔들고 있는 엄마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떠한 생각도 감정도 느낄새없이 손을 흔드는 엄마를 향해 나도 같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표정또한 슬픔도 아쉬움도 내비칠수 없었다.
어떤 표정을 짓는것조차 판단이 서지 않았기 때문에.
그 날이 내 기억속에 필름처럼 저장되어 여전히 어제 일과 같이 생생하면서도 아득하다.
초등학교 6학년을 앞둔 13살에 나는 친할머니집에 홀로 떠넘겨졌다.
친할머니집은 버스도 딱 2대만 다니는 산속 깊은 시골이었고, 저녁 8시만 되면 깜깜해져 고요한곳이었다.
집이 두채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하나는 창호지문을 열고 들어가면 거실과 작은 방, 화장실이 딸려있는 딱 시골스러운 그런 집이었다.
유일하게 보일러가 돌아갔지만 그 곳은 밥을 먹거나 화장실을 갈 때, 명절날 식구들이 오면 그때 보일러를 켜고 자는곳이었다.
한채는 소3마리와 함께 불을 떼우는 부뚜막같은곳이 있었고,
이 부뚜막은 부엌으로 사용되는게 아니라 부뚜막 바로 옆에 딸려있는 작은방에 불을 떼우는 용도로 쓰였다.
나는 그 방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잠을 잤다.
불을 떼면 방이 그을릴정도로 뜨거워져 할머니 할아버지는 거기에 몸을 지지곤 하셨고 나도 겨울이 되면 그곳에 누워 언 몸을 달구곤 했다.
“애를 맡겼으면 지가 와서 무슨 말이라도 해야할거 아녀~?”
“아 전화했으면 됐제~”
할아버지는 앉아서 방을 쓸며 애앞에서 그만 얘기하라며 할머니에게 눈치를 주었다.
어렸지만 나도 그정도 눈치는 있었다.
엄마는 아마도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미리 말도 안하고 나를 보냈던거다.
내가 가는날 급하게 전화해 마중나와달라고 했던것같다.
초등학교 5학년 마지막 겨울방학이 끝나갈 무렵 엄마는 시골에 왔다.
나를 잠깐만 맡아달라고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부탁하고 엄마는 나를 시골 근처 학교에 전학보내기 위해 서류들을 제출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시골에서는 13살짜리가 놀만한게 없었다.
TV에서도 애니메이션이 나오지 않아서 할머니가 즐겨보시는 드라마를 같이 보거나 일요일이면 전국노래자랑을 봐야했고,
근처에는 슈퍼가 없어서 맛있는 과자나 아이스크림 대신 나물반찬이나 할머니 할아버지가 기르시는 고구마, 감자에 길들여져야 했다.
그리고 언제나 나는 엄마를 그리워하며 엄마에게 하루에도 두세번씩 전화를 했다.
그때마다 엄마는 전화를 받지 않았지만, 한번씩 받을때마다 엄마의 목소리가 좋았던 난 그게 하루의 낙이었다.
새로 들어간 시골에 작은 초등학교에서는 한 학년에 열명 남짓한 아이들이 있었다.
친구들과 제법 친해졌고 조금씩 적응해나갔다.
엄마는 3달에 한번정도 나를 따로 불러내서 목욕탕에 데려가서 때를 밀어주고 옷을 한벌 사주고, 맛있는 갈비를 사주셨다.
그게 엄마와 나의 데이트였고 정해진 코스였다.
항상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비밀로 하고 나가는게 마음에 걸렸지만, 엄마는 내게 거짓말을 시켰다.
지금 생각해보면 할머니 할아버지도 눈치채셨겠지만 내게는 별말씀 하지 않으셨다.
그러다 어느 계절에 아빠가 시골로 왔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나누는 얘기를 들어보니 아빠는 하얀 병원에 다녀오셨다고 한다.
아빠는 엄마를 아주 많이 원망하고 있었고, 아빠는 예전과 다르게 기운이 없어보였고, 신경안정제라는 약을 늘 복용하셨다.
폭력적이고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욕을 퍼붓는 모습이 없어져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겼다.
아빠는 겨울쯤 되어서 서울로 가셔서 일을 시작하셨다.
사실 아빠가 언제 다시 서울로 가셨는지는 기억이 희미하다. 아마도 난 그때 아빠를 기억해내기 힘들었던거 같다.
시골에 있는동안 엄마에게는 하루에도 몇통씩 전화해도 아빠를 찾진 않았으니까..
내겐 엄마가 더 필요했던 시기였다.
어느날은 시골집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대신 받다가 큰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큰아버지는 내가 이름을 밝히자, 안부인사나 어떠한 말도 없이 다짜고짜 말하였다.
“니 엄마한테 빨리 너 데려가라 그래! 왜 할머니 고생시키고 그러냐.“
그때의 그 말이 지금까지 이렇게 상처가 되어 아물지 못한채 남아있다.
나는 지금도 명절을 싫어한다.
명절날, 엄마아빠랑 나는 어딜가나 찬밥신세였다.
누구도 우릴 반기지 않는거 같았고 어린나이에도 그런 느낌이 그대로 전해져 견딜수가 없었다.
그런데 시골에서 살때에는 어딘가로 도망칠수도 없었고,
나는 그렇게 하나씩 서울에서 내려오는 차들이 들어설때마다 긴장된 마음으로 친척들을 맞이하여야 했다.
아빠는 그런 나를 ‘천덕꾸러기’라고 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자기전에 국어사전을 뒤져 찾아보았었다.
‘천덕꾸러기,남에게 천대를 받는 사람이나 물건.‘
아빠는 아주 적절한 표현을 했구나 싶었다.
그해 겨울에는 폭설이 내렸었다.
가파른 그 시골길에서 눈이 내 키만큼 쌓였었다.
차는 더이상 들어서질 못했고, 나는 한시간이 넘는 그 시골길을 걸어가야만 했다.
손발이 얼어붙을것만 같았다.
겨우 도착해 부뚜막 옆 뜨겁고 작은 방으로 들어가 꽁꽁 얼어버린 손발을 녹였다.
동상에 걸려 손발이 빨갛게 부어올랐다.
나중에 알았지만, 엄마는 그 얘기를 듣고 울면서 나를 데리고 와야겠다 생각했다고 한다.
그때 일은 내게 훈장같은 일처럼 종종 엄마에게 얘기하곤 했다.
그 당시 아픔을 알아달라는 내 어리광이기도 하지만 엄마에게도 마음 아픈 일이었겠지.
그렇게 시골에서 ‘천덕꾸러기’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보내고 난 엄마에게 돌아갈수 있었다.
나에게는 썩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던 4계절이었지만, 그 4계절의 기억이 모두 또렷하다.
오디를 따먹다가 손과 옷이 보랗게 물들고,
떡볶이가 너무 먹고싶어서 명절날 뽑아놨던 가래떡으로 간장과 고추장만 넣고 만들었던 영문모르게 까맣던 나의 서툰 떡볶이.
시끄러운 벌레소리와 소똥냄새가 가득했던 방에서 귤을 까먹던 날
소똥때문에 몰려드는 파리떼로 파리채로 파리를 잡으며 하루를 보냈던 나
내 생일날 어디서 케이크를 구해와 내게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며 눈시울을 붉히던 할머니
매일 방을 쓸고다니며 깨끗이 정리해라, 불은 끄고 다녀라, 잔소리를 하던 할아버지
천덕꾸러기는 그 기억을 안고 어엿한 어른이 되었다.
그래서 더 단단해졌는지 물러졌는지는 모른다.
영양가 없이 자라난 어른일지 모르지만, 분명한건 지금의 난 천덕꾸러기가 아니라 사랑받는 아내, 엄마라는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누군가도 천덕꾸러기인가?
잊지말자.
이 글을 쓴 작가도 천덕꾸러기 시절이 있었고, 우리의 계절은 결국 지나갈거라고.
쓰라린 계절계절마다 아픔은 깊게 새겨지고 사라지지 않을지언정, 따뜻한 기억들이 덮어줄거라고. 그렇게 희미해져갈거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