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페스티벌에 기대하는 것
다양한 사이즈의 배낭, 캠핑 장비와 주류 박스를 메고 들고 끌면서 웃고 떠들며 모두 한 방향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의 거대한 물결. 티켓 교환 부스 앞에서 수십 미터 때로는 수백 미터의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리고 있지만 지겨워하는 이 없이 주체할 수 없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는 사람들.
음악 페스티벌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가슴 뛰는 풍경이다.
나이를 먹고 나서는 취향이 조금 변하기는 했지만 어린 시절 음악 공연이란 나를 압도하는 무언가 였다. 퍼포머를 근접한 거리에서 보기 위해 아니면 단순히 문화생활을 향유하기 위해서 라거나 기분전환을 위해서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대체로 강력한 장르의 음악을 좋아하는 탓도 있었겠지만 공연장이나 큰 무대에서 연주되는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혼자 집에서 음악을 들을 때는 느낄 수 없는 거대한 공기의 흐름을 몸으로 느끼고자 함이다.
대부분의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으로, 학창 시절에 학교에서도 이른바 언더그라운드 커뮤니티를 형성한다. 이런 소수의 커뮤니티는 상당히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취향은 쉽게 알아보고 쉽게 친해진다. 다만 비슷한 취향의 사람들 숫자가 소수이다 보니 전교에서도 특이한 취향으로 취급을 받았다.
당시에도 음악 감상실이나 클럽도 있었기에 주말마다 가서 스트레스를 풀곤 했지만 지방 도시에서는 온 동네에서 모여봐야 그 숫자 자체가 많지 않았다. 당시엔 온라인이 활성화되기 전이라 이런 빈약한 오프라인 모임으로 커뮤니티로써 기능하고 안식처로 느껴지기에는 그 규모 자체가 너무 작았다.
그렇게 학창 시절을 보내고 나서 처음으로 내가 특이한 취급을 받지 않았던 때가 음악 페스티벌이었다. 나의 첫 페스티벌은 쌈지 사운드 페스티벌 (쌈싸페)이었는데, 나와 대략 비슷한 취향의 멋쟁이 형누나들이 가득한 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동질감이라는 것을 느끼는 소름 돋는 경험을 했다. '나와 비슷한 사람이 한국에 이렇게 많았다니.' (사실 그 숫자도 소수다. 단지 전국에서 한날한시에 모였으니 많아 보였을 뿐)
후지 록 페스티벌의 캠핑사이트 언저리에 있는 세면장에서 양치질을 하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에 서 있을 때였다. 또래로 보이는 바로 앞의 평범한 남자가 입고 있는 티셔츠는 이 페스티벌의 5년 전 공식 머천다이즈 티셔츠였다. 대부분의 공식 머천다이즈 티셔츠가 그렇듯 등에는 해당 연도 아티스트 라인업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데, 이 것이 눈에 들어왔다.
'우와. 5년 전에도 왔었나 보네. 이때는 이런 공연을 했구나. 재밌었겠네.'
그러던 중 앞의 남자와 우연히 눈이 마주쳤다. 괜히 어색해서 말을 걸었다. 여기는 페스티벌 캠핑장이 아닌가. 오늘 처음 보는 사람과도 편하게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 특별히 이상한 광경은 아니다.
"5년 전에도 왔어?"
"거의 매년 오고 있어. 얼리버드 티켓이 오픈되면 그냥 일단 결제부터 하고 날짜는 휴가 일정을 맞춰. (당연하다는 듯이) 후지 록 페스티벌이잖아."
"멋지네, 나는 한국에서 왔어. 여기에 온건 올해가 처음이야. 나도 내년에도 또 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매년 와도 항상 새롭고 실망하지 않아. 내년에도 보길 바래."
다소 내향적인 성격으로 보이는 그 남자는, 단지 후지 록 페스티벌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일 년에 단 5일간의 평화를 즐기기 위해 매년 이곳을 찾고 있었다.
캠핑 사이트를 운영하는 아웃도어 타입의 페스티벌들은 페스티벌 사이트의 사이즈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넓은 규모의 캠핑 사이트를 갖추고 있다. 캠핑 사이트의 분위기는 일반적인 캠핑장에서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음악을 사랑하는 남녀노소 (비율로 보자면 20~30대가 가장 많겠지만 정말로 어린아이부터 어르신들까지 전 연령대가 다 있다. 가족으로 치자면 3대가 모두 있는 셈)가 같은 목적으로 한 곳에 모인다.
물론 1인용 텐트를 가지고 혼자만의 사색 (음?)을 즐기러 오는 사람들도 소수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열린 마음으로 4박 5일 동안 서로 친구가 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일 년 중 단 3-5일 정도의 기간 동안 모두가 바라고, 기대하는 바는 같기 때문이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감동적인 순간들이 있다. 공연을 보며 느끼는 어떤 감동적인 순간 일수도 있고 때로는 예상치 못한 즐거운 상황에 맞을 때도 있다. 예를 들어 마지막 하나 남은 올해의 공식 머천다이즈 티셔츠를 손에 넣는 순간이라던가...
이때 문득 주변에 모르는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서로 이런 눈빛을 주고받는다. '너도 느끼고 있지? 뭔지 알지?' 이심전심이라고 해야 하나. 그 많은 사람들이 같은 장소에서 동시에 느끼는 이 기분을 모두가 함께 공유하고 있다는 것에 일종의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이런 일이 생각보다 빈번하게 발생하는데, 그럴 때면 '여기가 유토피아인가. 돌아가기 싫다.'라고 느껴질 때가 많다.
오히려 조연에 가깝다. 음악 페스티벌이 주는 즐거움은 단순히 공연 때문이 아니다. 페스티벌 메인 게이트를 지나며 이른바 속세와는 단절된 세상으로의 진입, 고민과 스트레스가 가득한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이것이 진정 음악 페스티벌이라는 공간과 시간이 제공하는 즐거움이다.
어디서 많이 본 문구가 떠오른다. '모험과 신비의 나라로의 여행'
한국의 왜곡된 "좋은 페스티벌"이라면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개수의 공연을 보는 것이라 정의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페스티벌이라 하면 사람, 장소, 사이트를 구성하는 다양한 즐길 거리와 맛있는 음식 (그리고 술이 빠질 수 없...) 등이 어우러져 있어서 공연의 연장선으로 한정 짓기보다는 오히려 테마파크와 연결점이 있다. 단순히 여러 회차의 콘서트를 한자리에 모아 놓은 것이 음악 페스티벌은 아니라는 얘기이다.
이 부분은 페스티벌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에서 경험 (Experience)의 부분이 가장 중요한 요소로 위치하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음악 페스티벌은 모두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가치이다.
어린 시절 들뜬 마음에 밤잠을 설치고 부모님 손잡고 갔던 테마파크, 이것이 우리가 기대하는 음악 페스티벌의 존재의 이유와 일치한다. 음악이 중심이지만 전부가 아닌 한정된 시간 동안만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문, 그것이 음악 페스티벌이다.
국내에도 이렇게 경험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페스티벌이 있다. 하지만 아웃도어형 페스티벌보다는 시티형 페스티벌이 많다 보니 여러 가지 제약으로 인해 공연 외에 다른 프로그램과 시설을 만들어 놓기란 쉽지 않다. 거기다가 소비자가 신경 쓰지 않는 부분을 무리해서 셀링포인트로 잡고 막대한 예산을 들이면서 프로그래밍을 한다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음악 페스티벌이 막 알려지기 시작한 2000년대부터 2020년까지 돌아보면 다양하고 개성 넘치는 페스티벌도 늘어나고 관객들의 경험 또한 많이 발전했다. 해외의 역사 깊은 페스티벌들이 대부분 50년쯤 되었고 긴 시간을 천천히 관객과 함께 성장해온 것을 보면, 앞으로 국내에도 다양한 경험과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는 페스티벌이 많아질 것이라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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