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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승환 Aug 05. 2021

자고 있던 김기춘을 깨운 조윤선의 반격

43. [듣다] - 다 같이 보고 있어도 나만 쓸 수 있는 기사가 있다

2017년 6월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는 국정농단 사건의 한 갈래인 블랙리스트 재판이 한창이었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은 박근혜 정부 때 청와대와 문화체육관광부가 진보 성향의 문화예술계 인사를 감시하고 보복하는 등 직권남용을 한 일을 일컫는다. 당시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과 조윤선 문체부 장관이 이런 혐의로 구속돼 재판에 넘겨진 상태였다.     


6월 30일 열린 재판도 여러 차례 이어진 통상적인 블랙리스트 재판의 연속이었다. 기자들은 방청석에서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오가는 말들을 받아 적었다.      


오전 10시부터 재판이 시작했는데 이날도 김 전 실장은 의자에 앉아서 눈을 감고 자고 있었다. 그는 나이가 많고 건강에 문제가 있어서 재판 때 주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해왔다.      


반대로 조윤선 전 장관은 자리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며 자신에 대한 피고인 신문을 준비했다. 몇 장의 서류를 꼼꼼히 읽고 볼펜으로 수시로 메모를 했다. 옆에 앉은 변호인과 상의도 여러 차례 하더니, 오후 3시를 넘겨서는 팔짱을 끼고 앉아 미소를 보였다.      



이날 재판에 들어가기 전에 특검팀 한 관계자는 "조윤선 전 장관이 눈물로 호소할 가능성이 크다"고 예상했다. 하지만 조 전 장관은 정반대로 반격에 나섰다. 그는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면서 특검의 질문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특검팀의 질문이 모호할 땐 오히려 구체적인 시점과 상황이 어땠는지 되묻기도 했다.


그러자 이날 재판 내내 자고 있던 김 전 실장이 눈을 떴다. 의자에 기대 앉아 있던 자세도 고쳐 잡고 조 전 장관의 대답을 지켜봤다. 신문을 준비하는 조 전 장관의 모습과 깨어난 김 전 실장의 모습은 다른 기자들도 모두 봤지만 지나쳤던 장면이다. 내 눈엔 이날 법정에서 나온 어떤 발언들보다 가장 흥미롭고 핵심적인 장면이었다. 


"자고 있던 김기춘도 깨운 조윤선의 반격"이란 제목의 기사는 이날 이 재판을 기록한 기사들 중 가장 많은 조회 수와 댓글 수를 기록했다. 매일매일 돌아가는 지루한 재판에서도 남들은 놓칠 수 있는 그날만 보이는 모습이 있을 수 있다. 이런 모습을 포착해 의미를 부여하는 게 많이 읽히는 기사를 쓰는 비법 중 하나이다.



이 내용은 책 <기레기를 피하는 53가지 방법>에 담긴 글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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