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40여 년을 두 발로 걸으며 평범하게 살아왔는데 하루아침에 걷지도 못하고 휠체어 생활을 하려니 여간 답답한 게 아니었다.
못 걷는 거야 그렇다 쳐도 두 손다 떨림이 심하다 보니 일상생활이 많이 불편해졌다. 뜨거운 커피 마시는 걸 좋아하지만 혹여나 떨리는 손으로 잡다가 쏟아서 화상 입을까 봐 포기해야 했고 병원 관물대위의 화장품이나 텀블러도 쓰러트리기 일쑤였다.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떨림이 심한 내손을 보고 파킨슨병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친정엄마도 걱정을 많이 하셨다.
지금이야 핸드폰으로 일기도 쓰고 문자도 보내고 유튜브 편집도 직접 하는 내공이 쌓였지만 쓰러지고난 후 얼마 안 됐을 땐 한글자판 치는 게 많이 힘들었다.
제주도에서 한달살이 할 때의 일이다. 제주에 머물며 저녁엔 주로 가족이 보드게임을 하거나 TV를 보곤 했다. 그때 마침 우리가 보던 프로그램의 촬영지가 제주여서 나도 그곳에 가보고 싶어졌다. 남편은 욕실에 씻으러 갔고 의찬이와 같이 있던 터라 의찬이한테 그 장소를 핸드폰에 메모해 달라고 했다. (여기서 미리 말해둘 게 있는데, 남편은 내가 빨리 나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려 주면서 직접 하도록 했다. 나도 남편의 마음을 잘 알았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도움받기보단 직접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날 그 시간에 사달이 나고야 말았다) 그날 나는 너무 피곤해서 더 이상 무얼 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고 의찬이는 아빠가 평소에 하는 걸 봐 왔던 터라 내게 "어머니가 직접 해보세요"라고 말한 거다. 남편이 옆에 있었더라면 내 상태를 보곤 말없이 해줬을 텐데 그런 것까지 살피기엔 아직은 어린 아들이었다. 순간 설움이 북받쳐 오르면서 제주까지 와서 이래야 하나 싶고 어린 아들도 날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난 분명 낯설고 힘든 재활치료를 잠시 떠나 쉬러 온 건데...
"이럴 거면 제주에 왜 데려왔어?"
"난 내일 집으로 갈 거야"라며 울면서 얘기했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여행 와서까지 무시당하는 것 같은 현실이 싫었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무거워진 마음을 안고 울면서 겨우 잠이 들었다.
아프고 나니 답답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난 새벽에 일어나는데 반해 직장생활을 하는 남편은 쉬는 날 늦게까지 자고 싶을터..
내가 혼자 움직일 수 있으면 굳이 남편을 깨우지 않아도 되겠지만 아직 우리 집은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 돼있지 않은 관계로 하나부터 열까지 남편의 도움이 필요하다.
안 그래도 집안일로 바쁜 남편인데 나까지 남편을 계속 부를려니 미안하기 그지없다. 병원에선 환자들을 위한 시설들이 있으니 자유롭게 움직이는데 집에선 남편의 손길이 꼭 필요하다.
그러나새벽에 깨우기는 영 미안해서 잠은 병원에서 자고 집에 잠깐 다녀오는 외출을
자주 하게 된다. 그나마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규제가 많이 완화돼서 우리 병원에선
외출이 자유롭다.
내 삶이 예전의 삶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느려지고 답답하게 느껴진다고 해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친구 되신 예수님 손 꼭 붙잡고이 삶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낼 거란 거다.
내가 부정한다고 이 삶이 내 삶이 아닌 게 아니다.
끝까지살아내 보자.
故안수현 저자는 <그청년바보의사>에서 환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선생님의 병을 낫게 하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제가 기도하는 것은 병이 낫는 것보다 선생님이 주어진 곡을 최선을 다해
연주하고 나서 성도들과 천사들의 우레와
같은 갈채를 받으며 무대에서 내려가는 것입니다"
나도 연주회를 위해 무대에 올라가는 발걸음은 그렇게 무겁고 부담스러울 수 없었다.
'혹 실수하면 어쩌지?' 하는 마음과 나를 바
라보는 시선들 때문이다.
그러나 연주를 마치고 내려오는 발걸음은
가볍고 후련하다. 내가 뇌출혈 후유증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고 이 삶의 여정을 끝낸 후 주님품에 안긴다면, 그래서 주님이 "딸아! 불편한 몸으로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다"하고 맞아주신다면 고생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