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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vsnjutare Jun 21. 2018

스톡홀름 신드롬은 어디에서 왔을까 (10/13 수정)

스톡홀름 신드롬의 유래 '노르말름 신용은행 납치사건' (1973년)


스톡홀름 신드롬 (Stockholm Syndrome)

우리가 흔히 겪는 상황이 아닌, 납치나 인질극의 상황에서 인질이 살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일시적인 정신 신경증인지 모를 원인으로 납치범들에게 감정적인 동화가 나타나는 현상. 학대받는 아이들이나, 매 맞는 아내처럼 일부의 극단적 사례에서도 종종 나타난다고 한다.  


 



삶에서 흔히 겪는 일로는 보기 어려운 인질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인질범들에 대해 그러면 인질들은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 어떤 반응을 하게 될까요?


이 두 가지의 물음에 대한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킨 스톡홀름 증후군의 배,

'노르말름 신용은행 강도납치사건'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노르말름은 스톡홀름의 시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번화가 지역이지만,

1973년의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렇게 잘 알려진 곳은 아니었습니다.


지금부터, 사건이 일어났던 45년 전의 평범했던 여름날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스웨덴 스톡홓홀름 시 노르말름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노르말름 신용은행 (Norrmalm Kreditbanken).  현재도 그 자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1973년 8월 23일 오전 8시 경, 도심에 위치한 신용은행은 여느 때처럼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제 막 만기출소를 마치고 나온 당시 32세 남성 얀-에릭 올슨(Jan-Erik Olsson) 과 교도소 동기이자 공범이었던 26세 남성 클라크 올롭슨 (Clark Olofsson)에 의해 아수라장이 됩니다.


 

 

왼쪽 사진이 납치된 4명의 인질이며, 그 중 주목해야 할 인질로서 Clark(인질 중 유일한 남성, 24세)와

사진의 가장 왼쪽 첫번째 줄에 있는 여성 (A라고 칭하겠습니다. 당시 23세) 이 있고, 오른쪽의 체포 현장에서 꼿꼿이 고개를 치켜들고 있는 남자가 바로 최후에 체포된 범인 올슨입니다.  


납치는 당일 오전 9시 전후였고, 이들은 모두 은행금고에 감금되었습니다. 은행금고는 당시 은행과 함께 1층에 있었고, 2층부터는 비즈니스공간과 거주공간이 함께 있는 구조의 건물이었습니다. 초기에는 전화를 비롯해 아무것도 사용할 수 없다가, 납치로부터 약 3시간 정도가 지난 당일 오후 12시경, 은행 직원인 클라크의 신고에 의해 경찰이 즉시 출동해, 사건은 곧 해결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발생합니다.


즉시 출동했던 경찰관에게 이들은 총기를 겨눴습니다. 이 과정에서 1명의 경찰관이 총상을 입고

아무 소득없이 물러설 수 밖에 없게 되자, 경찰은 이들을 얕봤다는 것을 깨닫고 단순하게 진압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경찰과 국가가 전면 이들을 위한 협상을 통해 인질을 다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식으로 선회합니다.


공범과 그의 협상안은 심플하면서도, 어처구니 없는 내용이었는데,

300만 크로나의 몸값 (현재 한화 가치로 약 3억원), 도주에 필요한 차량,

자신들의 안전을 위한 방탄헬멧과 장전된 권총 2정이었습니다.  


당연히 정부는 이를 어처구니 없는 협상이라 판단하고

일정 부분에 관해서만 협상하려했고, 결국 1차 협상은 결렬됩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고, 이번에는 인질로 인해 새로운 국면에 맞이하게 됩니다.  

  

근대화 이후의 스웨덴은 경찰이 범죄자에 의해 공격당하거나 피해를 입은 경우가 거의 없었기때문에 그 심각성이 컸던터라, 그들을 위한 언론이나 정부가 만든 비공식적 연락채널을 통해 지속적으로 협상을 시도해왔습니다. 그러던 도중, 유독 납치 시점에서부터 불안증세를 보이던 인질 중 1명 크리스틴 엔마크(아까 A라고 칭했던 여성)이  "나는 경찰이나 국가의 품보단 그와 함께 있을 때가 좀 더 안정적이고 평화롭다. 오히려 경찰은 너무 비협조적이며, 비 인도적인 수사방식과 태도로 임하고 있다." 면서, 감정적으로 그에게 깊이 동화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미 1차 협상에 실패했고, 여론의 분위기마저 정부에게 비판적이었던 상황에서 당시 스웨덴 정부와 경찰은 오히려 더 강경하게 대응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질을 위해서라도 이들의 요구를 들어줘야 한다"는 굉장히 비합리적인듯 합리적인(?) 의견 변화가 있게 됩니다. 2차 협상안으로는, 그간 정부에서 거절해왔던 도주차량의 제공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인질범들은 이마저도 거절하면서 2차 협상이 순식간에 결렬됩니다.  


 사건 발생시점으로부터 40시간이 지난 8월 24일 저녁, 대담하다 못해 미쳤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과감했던 인질범들은 이제는 당시 총리였던 올로프 팔메에게 두 차례의 협박 전화를 걸게 됩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지금 당신에게 전화를 두 번 걸었지.
괘씸하게도, 첫 번째 전화는 받지도 않았어.
그러니까, 나는 이 인질범들을 다 죽여버리고 말거야.
(이후 3초간 여성의 비명소리가 들리고 끊김)

이 통화 이후, 이미 3일 가까이가 지난 8월 25일 오전, 인질이 태도를 바꿔 구조 요청을 적극적으로 하기 전까지 스웨덴 정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가, 그가 우리를 너무 가혹하게 대하고 우리를 구조하는데 도와달라는 전화내용을 듣고, 바로 정부와 경찰이 출동하게 되는데, 이 과정이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사실, 그들이 방법을 논의하고 출동시점을 정하는 사이 이미 달력은 8월 26일 (납치 4일차) 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런 저런 방법을 모색하던 이들은 건물의 1층으로 직접 돌입하는 것이 아니라, 2층의 아파트로부터 동의를 얻어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금고를 향해 벽을 뚫고 돌입하는 방법으로 작전을 세우게 됩니다.


범인들도 바보는 아니었는지, 이제까지 베일에 싸여있던 사건의 공범인 남자 Clark (은행원과 동명이인. 같은 인물 아닙니다) 가 등장해 이들을 향해 총을 쏘며 저항하기 시작합니다. 저항을 하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실 체포됐지만, 실행범인 Jan은 붙잡히지 않았고 생화학가스를 쓰겠다고 더 심한 저항 아닌 저항을 하다가  3시간만의 대치 끝에, 약 80시간동안 유지되었던 납치사건이 끝나게 됩니다.



  


그 공범이 그러면 왜 충격적이냐고 물으신다면,

'공범의 존재'는 사실 그가 총을 쏘아 경찰에 저항할 때까지 단 한번도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과거의 전력이 아주 화려했지만 적어도 이 사건에선 진범보다는 활약이 상대적으로 작았기 때문이죠. 



공범 Clark Olofson. 1973년 8월 26일 오전에 체포되는 모습이 우측. 좌측이 그의 당시 사진.


오른쪽 눈의 상처는 경찰과의 대치과정에서 생긴 상처입니다. 절대 그가 처음부터 저렇게 생긴 사람이 아니었어요. 사건에서 그는 경찰들을 견제하고 인질들을 감시하는 협력범의 역할을 맡았으며, GTA 장면처럼

사람 치거나 죽이거나 훔쳐서 달아나는 도주를 즐기는 그냥 상상 이상의 범죄자정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렇게되면, 궁금해집니다.

그래서 얘네들이 누군데? 








협력범 Clark (좌, 당시 26세)에 대해 먼저 설명 드리자면, 1947년 스웨덴 서부의 최대 항구도시 예테보리에서 태어난 그는 여동생 2명과 함께 주로 어머니에 의해 길러졌지만, 양친 모두 심각한 알콜중독이었고, 그나마도 그가 7살이 된 1955년 이혼하게 되면서 기구한 유년시절이 시작됩니다. 어머니는 그를 포함한 여동생들의 양육 의무를 유모에게 전면 방기했고, 그에게 있어서 엄마 = 유모라고 생각하며 자라나게 됩니다. 동네에서 이미 될성부른 좀도둑으로 자라난 그는 16세가 되던 1963년부터 스웨덴 정부가 감시하는

"범죄 가능성이 높은 범죄자" 명단에 올라 1급 관찰대상으로 수배되었고, 1964년 초 도둑질을 하다가 붙잡혀 감옥에 수감되지만 몇 개월 뒤인 같은 해 11월 첫 탈주에 성공합니다.


탈주 이후 길바닥에서 삶을 전전하고, 도둑질을 생업으로 삼다가 1965년 8월, 지역에 있는 공유지 온실로 숨어들어 첫 거처를 마련하지만 4개월 뒤인 그해 말, 아이러니하게도 관리인에게 들키면서 다시 길거리로 나앉게됩니다. 관리인이 경찰에 신고했을 때 이미 도주한 후였기 때문에 그의 체포시점을 지켜보고는 있었지만 뚜렷한 행적이 보이지 않다가, 1965년 12월 스웨덴 중부의 에스킬스투나 지역에서 강도짓을 하다가 경찰관 1명을 폭행해 붙잡혔고,  1966년 2월, 법정에서 4년형을 선고받게 됩니다.


상적이었다면 1970년까지 감옥에 있었어야겠지만 그는 1966년 5월, 입소 100일도 안되어 2차투옥을 시도하고 성공하게 됩니다. 흔한 GTA를 찍는 '탈주전문가'로 거듭나게 되지만, 이 탈주전문가의 이름도 얼마 지나지 않은 1967년 6월 29일, 이번에는 다른 청년 Gunnar (당시 23세) 와 함께 아파트 빈집털이를 시도했다가 주민의 신고에 의해 출동한 경찰을 사망하게 만드는 사건에 연루되면서  스웨덴 사회가 발칵 뒤집힙니다. 바로 도주한 이들이 붙잡히지 않는 듯 싶었지만…






사건 발생 약 20일 후인 1967년 7월 19일, 실행범 Gunnar는 예테보리 시내의 한 아파트에서 붙잡히게 됩니다. 이 아파트는 실행범의 여동생이 살던 아파트로, 소식을 접한 경찰이 습격했으나 놀랍게도 여기서 Clark는 도주에 성공하며 체포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보다 약 3주가 더 지난 8월 초가 되어서야 붙잡혔고, 당시 재판을 통해 8년형을 선고받습니다. 물론 실행범은 살인죄로 20년형을 선고받고, 1997년 5월 석방되었다고 합니다.


스웨덴의 형법은 1961년에 이미 반인륜적인 살인범죄라 할지라도 21년 이상의 형기를 부과하지 않는 형법상 개정이 이루어 졌기 때문에 8년형은 사실상 굉장히 '큰' 징벌이었습니다.


4번째 탈주는 수감으로부터 약 1년 반이 지난 1969년 2월 4일에 있었고, 큰 무리없이 탈주에 성공합니다.

(별로 지능이 엄청 좋은 사람도 아닌데 4번의 탈옥을 어떻게 성공한걸까 궁금하지만 자세한 것은 밝혀진 바 없습니다) 


이후 그는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로 건너갔다가, 1971년 다시 붙잡혔고 마지막으로 지낸 교도소에서 동기로 만난 범인과 함께 사건을 공모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이전 포스팅에서는 1972년 스웨덴에 귀국해 범죄에 가담했다는 내용이었지만 사실이 아닌 바, 수정하였습니다).




실행범인 오른쪽 사진 (사건 당시 30세) 의 남자는 1942년 스웨덴 남부의 도시 Ekeby (에케비) 에서 태어났습니다. 별다른 성장에서의 불우한 징후가 없었으나 그는 도둑질, 절도, 강도, 살인, 탈주 등에 중독 및 매료되어 범죄를 저지르고싶어서 안달난 이상한 심리를 가지고 자라났고, 10대 후반부터 작고 큰  범죄를 저질렀으며 결국, 그는 지역 교도소에서 몇 년간의 형기를 복역하고, 1971년 칼마르 교도소로 이감됩니다.

여기서 그를 만났고, 1973년에 계획되어있던 만기출소일에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겁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1975년의 재판에서 큰 형량이 나오지 않은 이들은

공범 Clark의 경우 벨기에로(1976년), 그리고 6년형을 선고받은 그(Olsson)는

1981년경 만기 출소 이후 태국으로 건너가 조용히 사는듯 싶었는데, 1995년 태국에서 다시 한 번 범죄를 자행하면서, 신병이 인도되어 스웨덴 헬싱보리 지역에서의 재판을 거쳐 만기출소 이후 2000년대 초반부터 '자동차 수리가게'를 운영하면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드는 것은 왜 스톡홀름 신드롬인가? 는 배경에서 답이 나오지만, 이것에 대해

'정신병'인지 아니면 '일시적인 감정의 이상현상'인지에 대한 논란이 남게 됩니다. 스톡홀름 증후군의 배경 사건이 있었을 때에도, 7년 형 밖에 형이 언도되지 않았고 (물론 납치극이 7년형이라는 사실은 중형이라 볼수 있지만), 어디선가 '얼핏' 들어본 적은 있지만 판단하기 쉽지 않을 겁니다.


학자들도 그렇습니다. 여전히 논쟁은 계속되고 있고, 양론으로서의 학자들의 연구가 활발히 이뤄졌습니다.

첫번째 측면은 바로 '이는 정신적 신경증이 아닌 엄연한 질환이다' 라는 편으로, 스톡홀름 증후군에 대해 범죄심리의 측면에서 최초로 정의한 학자 프랭크 오배리 (Frank Ochberg) 입니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그는 인질극이 벌어졌을 때, 인질들은 생명의 위협에 대한 일시적인 방어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공황장애와 같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방어, 회피, 불안을 동반하는 심리적인 기제나 행동, 언행이 '인질극이라는 계기'를 통해서 발현된 병적 증세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에 반론을 기하면서 오늘날의 스톡홀름 신드롬에 대해 정의한 학자가 등장하면서 학계에서의 입장이 뒤집어지게 됩니다. 바로, 닐스 베레욧 (Nils Berejot) 입니다.




그는 이는 정신병적 행동을 비롯한 자신을 피해자로 미화하거나 공황장애처럼 오는 병적인 증세가 아니라

인질극이라는 극도로 확률이 낮은 인질극이라는 상황에서 그들이 생명의 위협을 받았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보통의 정신상태가 아닌 극도의 공포감에 빠져 일시적인 방어행동을 하는, '신경증' 적 현상으로 정의했습니다.

  

그러면 이 두 논쟁을 불러일으킨 학계말고, 범죄를 항상 맞딱드려야 하는 기관이나 정부에서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흔히 그들은 2가지 근거로 분석하고, 사실상 양 학자들의 이론/입장을 좀 더 확장시킨 단계라고 보면 됩니다.



1. 대응 기제 (Coping Mechanism)


인질극 상황 속에서 불안감이나 방어적 감정이 지배하고 있는 인질들이 경찰이나 권위의 대상인 국가보다는 자신들이 직접 대면하고 있는 인질범들에게 긍정적인 감정표현을 함으로서 이를 벗어나려고 한다고 상황을 설명하는 입장으로, 극도의 공포상황이 생존본능을 자극시켜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지가 너무 강력한 나머지 나타난다고 봄.


2. 행동 양식 (정신병적 증세; Attachment Patterns)


면대면 상황과, 인질범은 힘이 있으나 인질들은 무력한 경우 혹은 인질범들이 '저항을 할 수 없고 순종적이어야만 하는' 상황일 경우에만 이러한 반응이 논리적인 차원에서는 성립되므로, 단순히 상황에 대한 대응기제가 아니라 이를 넘어서서 인지, 행동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 것 -  즉, 이들의 심리적인 반응의 원인은 단순한 일시적인 공포에서의 방어적 태도가 아니라 정신병과 같은 '병적 증세'로 취급할 수 있다는 이론. 사이비 종교에서의 세뇌로 인한 집단 자살을 사례로 들며 인질극에 대해서도 이 논지를 적용하려고 시도했고, 그 근거로서 인용되는 것이 '스톡홀름 신드롬'



이렇게 양분된 논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은 다름아닌 FBI 였습니다.

그들은 DSM-5 라는 범죄행동분석 기준문서를 바탕으로 제기하였습니다.



"PTSD (외상 상해 후의 스트레스로 인한 트라우마 및 장해증상) 와는 비슷하지만,

사실상 실체가 없다. 이렇다 할만한 '증거' 자료가 없기 때문에 정신병적 장해로도, 일시적 신경증으로도  분류하는 것은 어렵다." 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지금까지 스톡홀름 증후군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어떤가요? 당신에게는 정말 이것이 정신병으로 보이나요, 아니면

그저 과민한 신경적 반응으로 보이나요?


좀 더 자세한 스웨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포스트에서도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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