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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창우 Mar 19. 2020

사색76. 불시상경

5월 7일(수)

어머니는 아침상 차려 놨으니 챙겨 먹으라 하시곤 일 나가신다. 자기 일 마치고 들어오기 전까지 꼭 면도해라고 닫히는 문 사이로 당부하신다. 손사래 치며 알겠다 대답하고, 다시 침대 속으로 들어간다. 12시에 일어나 아침 먹으라 차려놓은 밥상을 점심으로 먹는다. 밥숟가락을 입에 넣으며 오늘 할 만한 일을 차근차근 챙겨본다. 집 청소, 건강보험 피부양자 등록을 위한 가족관계 증명서 발급, 이발소 면도, 어버이날 기념 카네이션 및 어머니를 위한 엽산 보충제 구매 등이다. 어머니는 어버이날 선물로 ‘엽산 영양 보충제’를 사달라 하셨다. 받고 싶은 선물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건 서로에게 참 좋은 일이다. 할 일을 결정하고 하나씩 처리해나간다.     

  

가족관계 증명서 발급받으러 동사무소 가는 길, 어젯밤에 듣고 싶은 영화음악으로 컬렉션을 만들어 놓은 리스트를 재생해본다. 귀에 꽂은 조그만 이어폰에서 웅장한 <스타워즈>의 메인 테마곡이 터진다. 다음 곡으로 <슈퍼맨>이 나온다. 그동안 두 곡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스타워즈와 슈퍼맨 메인 테마곡을 연속해서 들어보니 이 둘이 확실하게 다른 곡이라는 걸 알았다. 나중에 입으로 직접 부를 수 있을 만큼 차이점을 소개할 수 있겠다. 분명히 다른 노래인데 이 곡이 슈퍼맨인가, 스타워즈 인가 헷갈렸을까. 모호하게 헷갈린다 하기 전에 명확하게 차이점을 인식한다면 구분이 가능할 텐데, 이런 건 비단 스타워즈, 슈퍼맨 메인 테마곡뿐만 아니라 여러 오해의 소지를 발생시킬 일에도 적용 가능할 듯하다.      


다음으로 가슴 설레는 <백 투 더 퓨처> 메인 테마곡이 흐른다. 주인공이었던 젊은 날 마이클 J.폭스는 지금 자신이 파킨슨병에 걸려 느린 움직임, 떨리는 손, 둔탁해진 발음으로 살아갈 걸 예상했을까. 영화처럼 과거의 자신이 미래의 파킨슨병에 걸린 자신을 만나면 미래의 자신은 과거의 자신에게 뭐라고 말할까. 장애보험 들어놓으라 할까.      


웅장한 오케스트라로 구성된 영화 메인 테마곡이 귀에 계속 터지는데 갑자기 음악을 멈추고 날카로운 전화 벨소리가 끼어든다. 지난주 이력서 넣었던 J회사라며 내일 당장 면접을 보잔다. 내일 당장?! 용기를 내서 지금 지방인데 내일은 어버이날이라 하루 미뤄 면접을 보면 안 되겠냐고 주뼛거리니, 그쪽에는 그냥 면접을 진행하자고 한다. 저쪽에서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면접 응시자 쪽에서는 더 이상 주저하기 어렵다. 내일 면접합시다 하고 전화를 끊는다. 내일 오전 10시 서울에서 면접, 그럼 오늘 오후에 나서야 한다. 그렇게 기다리던 면접 전화지만 내일 당장 갑자기 오라는데. 어버이날이라 고향에서 어머니와 함께 보내고 주말에는 아버지 산소도 가보려고 했는데, 다 틀어지게 생겼다. 계획, 일주일 세워둔 계획도 이렇게 틀어지는데, 인생 같이 긴 기간의 계획은 말할 것도 없겠다.     


핍박을 받아가며 참아온 면도를 받으러 집 앞 이발소로 간다. 생각보다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렇게 해보고 싶었던 이발소 면도를 당하면서 드는 생각은, 면도를 당하는 것보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뜨거운 수건 마사지, 크림, 전통 면도칼로 면도해주는 게 내 기분을 더 좋게 하는 건 아닐까. 남성에 의한 남성만의 영역에 대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오히려 제공하는 사람이 더 기분이 좋을 듯. 예전에 같이 일하던 직장 동료들과 점심 먹으며, 컴퓨터 붙들고 서류 작업 같은 게 주요 업무인데 만약 몸을 쓰는 다른 일을 한다면 어떤 일 할까 이야기하는데, 한 동료는 고속버스 운전기사가 되고 싶다고, 대형버스로 유턴을 할 때 아파트 2층 베란다 높이에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네 개 정도 되는 차선을 집어삼키며 부웅 큰 차를 돌려보는 게 소원이란다. 나도 육체노동을 선택할 수 있다면 이발소에서 면도하고 싶다. 날카로운 칼로 하얀 크림 속에 있는 수염을 깎아 내는 걸 하고 싶다. 날카로움과 릴랙스 사이에 외줄을 타는 짜릿함. 머리 깎는 이발은 그렇게 하고 싶진 않은데 이발소에서 면도만 할 수는 없잖나. 노동이란 만족하며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선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병행해야 한다.      


어머니가 집 앞 분식점에 있다며, 순대 시켜 놨다고 얼른 오라는 전화가 온다. 마침 약국에서 사서 들고 있던 어버이날 어머니 선물 엽산 영양제를 선물로 드리고, 카네이션은 이미 이리저리 많이 받으셨던데 그래서 특별히 사지 않았다고 말한다. 순대는 맛이 없다. 나 기다리느라 식어서, 식으면 어떤 음식인들 다 맛없다고 기다리게 한 나에게 핀잔을 준다. 식어 맛없는 순대를 한 접시 비우고 집으로 가는 길, 내일 면접 보게 됐다고, 오늘 저녁에 서울로 올라가야겠다고 말문을 연다. 어머니는 섭섭한 표정을 짧게 짓고, 자식 가는 길에 본인의 감정으로 부담을 주지 않으려, 얼른 올라가라고 담담하게 말씀한다. 어머니는 서울 기차 타기 전에 저녁을 먹여야겠다고 미역국으로 저녁상을 차린다. 미역국 위로 어머니는 오늘 새벽에 교회에 가서 ‘하나님 어버이날 선물로 창우 취직하게 해 주세요. 제 어버이날 선물은 창우 취직이랍니다’ 기도했단다. 어머니 본인은 둘째 치고, 어버이날을 실직 상태로 맞이하는 자식 마음이 얼마나 힘들겠냐고, 취직하게 해 달라 이런 기도 안 하는 신앙인인데, 오늘 처음 기도했단다. 분자가 분모를 압도하는 신앙이다. 나쁘다고 말하기가 어렵다. 간절해서 기도하게 하는 게 신앙의 상수이니까.      


저녁 7시 반 KTX를 타고 서울로 간다. 올라가는 길 구약성경 창세기의 요셉, 그가 억울하게 감옥살이 한 이야기를 읽는다. 결국 고난으로 온전해진 인격이 훗날 한 국가의 번영을 만든다. ‘고난이 유익하다’ 말은 역설적이다. 무책임하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유익하다 해야 고난을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고난의 유익이라니. 무엇보다 지난번에 부산에 있다 갑자기 면접하러 서울 올라갈 땐 이번에 취업하겠구나 기대, 확신, 예상했는데 별다른 결과가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에 갑자기 올라가면서는 극적인 기대를 하기보다 내 예감과 취업은 별 관계없고, 신앙적으로 이 사건에 대해 맡기자 하는 마음이 생긴다. 내가 할 수 있는 부문에 최선의 노력을, 그리고 나머진 내 노력 영역 밖이다. 그 나머질 기대, 확신, 예상하기 시작하면 마음이 틀어진다. 


서울 집 침대에 눕는다. 아침은 고향 부산 집 침대에서 일어났는데, 예상도 못한 서울 집 침대에 누우니 순간 여기가 어디지 3초 정도 공간인식 장애가 일어났다가, 곧 이상할 것도 없다며 정상적인 공간으로 인식한다. 아니, 고향집을 떠난 잠자리가 이상할 것도 없다는 게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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