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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기자 Aug 03. 2020

소설' 음복'을 읽고

어떤 남자들은 영원히 모를 이야기

 거의 모든 인륜지대사를 제끼고 공부만 하더라도 모든 것이 용납되는 고3 때. 눈이 엄청나게 많이 내린 구정 어느 날 나는 새벽같이 일어나 버스를 타고 할머니집에 갔다. 아빠와 엄마가 어떤 계기로 대전투를 치른 후 엄마는 20년만에 처음으로 차례에 불참하겠노라고 선언했다. 언니는 엄마편에 찰싹 붙어서 차례 불참에 동참했고, 아빠는 명분없는 분노를 표출하며 곤란해하던 그때. 나는 "그럼 내가 할머니집 갈게"라고 말했다. 

어차피 엄마 없어도 일할 사람은 있었고 내가 엄마의 빈자리를 온전히 메우러 가는 게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내가 생각해낸 '요식행위'에 모두가 어느 정도 평안을 찾았다. 아무도 돌아다니지 않는 구정 새벽 수북하게 쌓인 눈에 발자국을 내며 할머니집에 갔다 돌아오는 길, 나는 조금 뿌듯했다. 그때의 쓸쓸하면서도 상쾌한 기분은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그땐 그 '뿌듯함'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할 언어가 내게 딱히 없었지만, 지금은 있다.

이 귀하디 귀한 고3이란 존재마저 끌어내서 꼭 참여하고야 말게 만드는 차례, 죽은 조상이 원하는 것은 그들을 기리다가 한 가정이 불행해지는 것이 아님에도 그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한쪽 성별에 수십년의 결혼생활 동안 이뤄지는 가해(다른 단어를 찾아보려고 했는데 내가 자라오면서 목도한 그 행위들은 '가해'였다), 이 부조리극의 한 가운데 서 있는 나. 내가 자처해 그 자리로 들어감으로써 나는 이것이 부조리극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깨달았고, 동시에 엄마가 20년 넘게 겪어온 차별의 증인으로서 분명하게 거듭났다. 그래서 슬프고 화가 나면서도 뿌듯했다.


 강화길의 소설집 '화이트 호스'에 실린 소설 '음복'을 읽고서는 나의 정체성의 한 조각을 형성하고 있는 이 기억이 떠올랐다. '음복'은 화자인 '세나'가 결혼 후 처음맞는 남편 가족의 제삿날 시댁에 방문해 보고 느낀 것을 풀어낸 이야기다. "그래서 아이는 언제 낳아"라고 묻는 집안의 악역 시고모, 치매에 걸려 아무 말이나 하는 시할머니, 그리고 친절하고 싹싹하지만 어째선지 시고모와 묘한 긴장관계가 흐르는 시어머니. 세나는 이들 사이의 민감한 기류와 역학관계를 재빠르게 포착한다. "고요하고, 모든 그늘이 사라진 듯한" 맑은 얼굴의 남편은 알지 못한 채(혹은 알지 않아도 된 채) 어른이 되었고, 지금도 알지 못한 채로(또 알지 않아도 되는 채로) 지내고 있지만.



 음식을 만들고, 타인의 감정을 살피고, 손님을 맞이하여 그들이 모여있는 자리에서 상냥한 말 한 마디를 건네며 분위기를 띄우고, 자식과 부모의 일상을 섬세하게 보살피는 행위. 이같은 정서적이고 물리적인 '돌봄' 행위에 동참하지 않아도 아무런 사회적 요구와 지탄도 받지 않아온 집안 내 남자들은 언제까지나 갈등의 당사자가 되지 않고 남는다. 그들에게 주어진 책무가 없기에 갈등도 발생하지 않고, 그들은 자신들이 방관자라는 것을 인식할 수도 없다.


 30대의 나의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어쨌든 나는 나이를 먹어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고 몇해 전 결혼을 했다. 남편 집에서는 명절 날 아침 큰집에 가 차례를 함께 지내기 때문에, 나도 첫 명절날 아침 큰집에 함께 갔다. 큰집 형님들은 앞치마를 두르고 차례 준비를 했고, 가족들은 나를 '무언가 더 바지런히 움직이지 않아서 불편한 듯한 태도를 계속 유지하는' 신참내기 며느리로 보며 흐뭇해했고, 시어머니는 이제 막 새식구가 된 나에게 일을 시키지 않기 위해서 본인이 앞치마를 두르셨다. 부랴부랴 차례를 지내고 상을 치우기 전, 시어머니가 나에게 "새애기도 첫 날이니까 인사 드려야지"라며 절을 하라고 하셔서 두 번 절을 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나의 남편과 그 가족들에 대한 애정과는 별개로) 그 순간을 떠올리니 무척 슬펐었다. 어떤 남자들은 "어떤 지점에서 슬펐던 건데"라고 묻겠지만, 나의 친구들은 "슬펐다"는 말을 듣자마자 별다른 설명없이 함께 슬퍼해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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