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에게 여행은
포르투에서는 2박을 할 계획이었다. 작은 마을이라 호텔이 많지 않았고 대신 아파트형 숙소가 많았다. 왠만한 호텔보다 저렴한 가격에 집처럼 아늑한 곳에서 지낼 수 있다는 생각에 작은 아파트를 빌렸다. 상벤투 역에 도착해 아고다 맵을 확인해 보니 도보로 10분 남짓한 거리였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철역 위로 올라왔다.
드디어 역밖으로 발을 내딛었을 때 난 그만 이 도시와 사랑에 빠져버렸다. 파스텔빛 건물들이 오밀조밀 모여있고 구불거리는 1차선 도로위로 자동차와 자전거들이 경쾌하게 지나고 있었다. 언덕 지대라 도시 자체가 크고 작은 물결 위에 세워진 것 같았다.
도로 사이 사이로 정겨운 골목들이 이어져 있어 도시라기 보다는 큰 마을 같았다. 너무나 사랑스로운 이곳에 순간이동이라도 한 듯, 한동안 자리를 뜰 수 없었다. 꿈같기도 마법같기도 한 포르투였다.
정신을 차리고 캐리어를 끌기 시작했다. 정겹게 보였던 언덕길을 막상 캐리어로 밀고 가보니 금새 현실감이 밀려왔다. 언덜길 + 돌바닥+ 경유 포함 16시간 비행 =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듯한 최악의 컨디션이다. 10분 남짓한 시간이 한시간은 되는듯 했다.
여차 저차 끙끙거리며 숙소 근처에 도착했다. 나는 호스트에게 전화를 걸어 어디로 가야할지 물었다. 아파트형 숙소라 따로 간파이나 이정표가 없기 때문이다. 호스트와 버스정류장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호스트는 이러 저러한 설명을 했는데 아무래도 둘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다보니 의사소통에 한계가 있었다. 전화기 너머 호스트의 안타까운 목소리와 함께 내 마음도 타들어갔다. 여긴 어디인가. 나는 누구인가.
결국 난 현지인 찬스를 쓰기로 했다. 지나가던 아저씨에게 "익스큐즈미"를 외친후 무작정 전화기를 내민 것이다. 전화기를 받아든 아저씨는 웃음기라고는 하나 없는 뚱한 표정에 무뚝뚝한 말투로 통화를 했다. 순간 속으로 아차싶었다. 이번 여행에 오기전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얘기를 숱하게 들었다. 별의별 방법으로 가방을 뒤져가고 하다못해 손에 있는 핸드폰까지도 낚아채가 팔찌형 체인으로 채워놓으라는 둥 그야말로 살벌한 이야기들이었다.
내 손으로 핸드폰을 안겨다 드린 셈인데 이런 바보같은 짓이 있나. 이 아저씨가 이대로 내 핸드폰을 들고 뛰면 어떡하지. 일도 알아들을 수 없는 포르투갈어로 호스트와 통화하는 아저씨를 보며 머릿속으로 별의별 생각이 다들었다.
그 때 아저씨의 눈을 보았다. 무뚝뚝하지만 우직해 보였던 눈빛. 응큼한 속내나 재빠른 계산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는 깊고 흔들림없는 눈빛 말이다. 그 순간 난 그냥 아저씨를 믿기로 했다. 아니 그냥 믿어졌다. 아저씨는 통화를 하며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난 그냥 말없이 아저씨 뒤를 따랐다.
5분쯤 걸었을까. 멀리서 말쑥한 정장 차림의 호스트가 뛰어오는 게 보였다. 호스트를 발견한 아저씨는 말없이 전화기를 건네 주고는 휙 되돌아 가던길을 가셨다. 난 아저씨의 뒷모습에 연신 오브리가또를 외쳤다.
그 이후로도 무수히 많은 선택의 기로를 만났다. 여행은 안전과 모험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이니까. 너무 움츠리면 다양하고 새로운 것들을 경험할 기회를 잃게 되고 너무 자유로우면 자신을 위험에 몰아넣을 수 있다. 기로에 설 때마다 난 아저씨의 눈빛을 떠올렸다.
인위적인 친절이나 의도적인 매너가 아니라 우직하고 정직한 사람들만이 풍길 수 있는 분위기와 눈빛이 있다. 밤에 열린 필리핀 마을 축제 때 초대해준 이들이 그러했고 낑낑거리며 셀카를 찍고 있을 때 무심한 듯 다가와 다양한 각도에서 사진을 찍어준 이들이 그랬다. 같이 찍은 사진을 보며 깔깔거리고 웃었다. 이들의 호의를 믿고 받아들였을 때 여행은 따듯해졌고 추억은 풍성해졌다.
여행에서 경험하는 새로운 문화나 역사도 결국은 사람 사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화려한 건물과 자연 경관도 아름답지만 그 안에서 부대끼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그래서 떠나게 되고 그들의 손을 잡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만난 그들의 이야기를 마음에 담고 돌아온다. 그게 그렇게 행복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