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노마드 in 유럽
하루의 반절은 한국에서 보내고 나머지 반절은 유럽에서 지낸다. 말도 안되는 얘기 같지만 정말 그렇게 지내고 있다.
유럽은 줌수업을 하기에 시차가 최적인 곳이다. 수업은 아이들이 하교한 이후에 이루어지므로 한국 시간으로 3시쯤 시작해 9시쯤 끝난다. 유럽은 한국과 8,9시간의 시차가 있어서 유럽에서는 오전 7시쯤 시작해 점심때 마무리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세수만 간신히 하고 수업을 시작한다.
주로 부엌의 식탁위가 내 작업실. 바깥 풍경도 잘 보이지 않고 볼 여유도 없다.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이들과 한참을 떠들다 보면 그냥 평범한 한국의 일상을 사는것만 같다.
수업을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집밖을 나오면 순간 깜짝 놀란다. 낯선 언어로 쓰인 상점 간판들이 보이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분주히 지나가는 남녀노소의 외국인들과 함께 거리를 걸으며 이곳이 유럽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방금 전까지 난 한국에 있었던 것 같은데. 꿈인지 마법인지 짜릿한 그 순간이 디지털 노마드의 최고의 선물 아닐까. 매번 감사하고 행복하다.
매일 지구 반바퀴를 도는 일상은 균형이 정말 중요하다.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한다는 건 다시 말하면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양쪽에 대한 긴장감을 놓지 않고 밸런스를 유지해야 한다.
수업을 하다보면 이 아이 저 아이, 이 상황 저 상황에 정신없이 마음을 뺏길때가 많다. 직업이라는 무게감에 내 타고난 소심함이 더해져 순간 순간 과몰입을 하고 만다. 수업이 뜻대로 잘 진행되지 않으면 마무리 후에도 스위치가 꺼지지 않는다.
내가 여행을 나와서 수업 준비가 소흘했던 건 아닐까, 다른 선생님들은 일분일초를 아끼며 수업에 매진하는데 이러다가 나만 경쟁에 뒤쳐지는 건 아닐까 등등…… 마음을 누르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러다 보면 남아있는 반나절의 여행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여기에 와있다니 내가 미쳤나봐, 이런 생각만 맴맴 돈다.
반대로 여행에 너무 몰입해도 큰일이다. 예쁜 장소, 맛있는 음식, 멋진 풍경을 일주일, 이주일, 한달, 두달 매일 경험하다 보면 어느새 여행에 푹 잠겨 현실 감각을 잊고 만다. 술에 취하듯 여행에 취해 살짝 몽롱한 기분이 들때가 있다. 그럴 때면 다음날 수업 준비하는 것도 귀찮고 일을 놓고 싶다는 유혹까지 찾아온다. 수업에 열의가 생길리 만무하다.
하루에도 몇번씩 이 두 생각들이 널뛰기처럼 오르락 내리락 거린다. 그 사이에서 매일 난 균형을 잡으려 애쓰고. 처음에는 갈팡질팡하던 마음 때문에 많이 힘들었다. 온탕과 냉탕을 수시로 오가며 정신이 없었으니까.
그러다 어느 날 저울의 영점마냥 딱 균형이 잡히는 순간을 만났다. 그리고 그 때 오히려 양쪽의 시너지가 확 일어나는 느낌을 받았다. 수업의 과몰입을 여행의 느슨함이 제어해주고 여행의 자칫 흥청망청을 수업의 긴장이 잡아주며 서로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게 된 것이다.
디지털 노마드에게는 이 균형점의 기억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다행인 건 딸깍하고 맞아 떨어진 그 영점의 기억이 너무 강렬해 절대 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북극성마냥 그 기억을 좇아 가다 보면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까지 길을 잃지 않게 된다.
일과 여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행복. 그 맛에 귀국 비행기에서 또 새로운 여행을 계획한다. 다음 디지털 노마드는 어느 도시에서 해볼까.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설레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