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케이션 in 포르투갈
리스본의 첫번째 숙소. 이 곳에서 우리는 3주를 머물렀다. 리스본 언덕이야 워낙에 유명하지만 막상 실물로 접했을때는 놀라움을 넘어 당혹감이 느껴졌다. 더구나 택시 기사가 잘 못 내려줘서 언덕 하나를 통으로 넘었어야 했다. 20킬로가 넘는 캐리어를 끌고 우둘투둘 돌길을 걸어, 아니 거의 기어 올라가니 숨이 턱까지 차며 하늘이 노래졌다. 저 언덕 너머 천국이 있는게 아닐까. 정신줄이 들락날락 거렸다.
택시 기사를 향한 온갖 원망과 분노의 단어들이 거의 바닥을 보일 때 쯤, 우리는 드디어 숙소 문 앞에 도착했다. 트램이 지나가는 길에서 살짝 들어온 골목에 따개비마냥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우리 숙소는 따개비 건물 2층, 원룸인듯 투룸인듯 침실과 거실이 길게 연결된 집이었다.
생각보다 협소하고 층고가 낮아 첫인상은 살짝 답답했다. 숙소에 워낙 까다로운 남편님은 벌써부터 얼굴로 불만을 쏟아내고 있었다. 못본척 고개를 돌리며 거실에 들어섰다.
예상되는 욕실과 부엌, 침실을 보며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거실 끝 기다란 창으로 햇살이 반짝이는게 보였다. 그 옆 작은 창문 앞에는 자그맣고 평평한 단이 있었다. 빨간머리 앤의 다락방 집처럼 창 앞에 올라앉아 창밖을 구경할 수 있는 곳이었다.
순간 집이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무채색 같았던 공간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고 따스한 온기가 공기를 채웠다. 손잡이를 돌려 창문을 활짝 여니 손 닿는 곳에 빨래줄 두 줄이 정겹게 걸려있었다.
유럽 골목을 걸으며 알록달록 걸려있던 빨래들이 그렇게 귀여워 보였는데 이제 나도 그 풍경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별것 아닌 로망 하나에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이 창으로 3주동안 우리는 많은 것들을 만났다. 매일 아침 소프라노 마냥 노래하던 새소리로 하루를 시작하고 정시를 알리는 성당의 종소리를 들으며 지구 반대편에 와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저물어 가는 햇살과 함께 들리던 트램소리는 옛날 흑백영화의 한장면처럼 운치를 더했다.
그렇지만 내가 가장 베스트로 꼽는 장면은 바로 남편이 창 너머 빨래줄에 빨래를 너는 모습이다. 파란 청바지, 하얀 티셔츠, 오렌지색 원피스, 아이보리 양말들까지 한장 한장 빨래줄에 걸릴때마다 창밖 풍경은 알록달록 풍경화가 되었다.
운이 좋으면 앞집 아주머니의 수줍은 눈인사도 볼 수 있었다. 사실 우리는 빨래 덕에 앞집과 안면을 텄다. 처음에 남편이 빨래를 널때 바로 앞줄은 손이 닿았지만 그 너머 두번째 줄은 너무 멀어서 빨래를 걸기에 위험했다. 빨래 널다가 낙상하는거 아냐? 그냥 포기하자. 떨어지면 해외 토픽된다. 남편 뒤에서 이런 말들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앞집 창가에 아주머니가 나타나셨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지만 아주머니는 이리저리 손짓을 해가며 빨래줄 돌리는 법을 알려주셨다. 도르래가 연결되어 있어 잡아 당기면 뒷줄이 자연스럽게 앞줄로 옯겨지는 원리였다. 남편과 나는 놀라움과 고마움을 담아 연신 아주머니께 그라시아스를 외쳤다. 빨래가 가져다 준 고마운 인연이었다.
사람이든 집이든 첫인상으로 판단하지 말아야지. 구석구석 어떤 보물이 숨겨져 있을지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