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대 심리학과. 고등학교 첫 모의고사 때 적은 내 희망 대학과 학과였다. 카운슬러가 되고 싶었다.
6학년 가을 어느 날, 바람에 노란 은행잎 후두둑 떨어졌다. 조용히 교실 문을 열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몸을 웅크리고 스탠드에 앉았다. 엄마의 죽음과 새어머니와의 갈등 속에 소리 없이 격렬한 사춘기가 시작되었다. 스탕달의 '적과 흙'을 읽고 일기장에 옆 반 선생님을 '위선자'로 묘사했다. 내 일기장이 6학년 선생님들이 돌려볼 줄은 몰랐다. 옆 반 선생님은 당신이 왜 위선자로 보이는지 눈물을 흘리며 물으셨다. 옆 반 선생님이 가난했던 내 친구를 체벌하는 것을 보았던 나는 큰 형보다 한 살 많았던 선생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못했다. 아버지와 새어머니 간의 반복된 갈등, 6살, 8살 많았던 형들의 반항과 부재는 내 유년시절을 잿빛으로 물들게 했다.
중학교에 진학 후 반장이 되었다. 내 겉모습은 책을 좋아하는 모범생이었다. 아무도 내가 학교 화장실에서 눈물자국을 지운 후 '차렷, 열중 셧'을 외쳤는지 몰랐다. "너 같은 애는 처음본다", "한심하다. 한심해" 학교에서는 듣지 못했던 비난을 집에서는 자주 들었다. 부모님의 질문에 대답을 늦게 하고, 걸레질을 두 번 하지 않고 한 번만 하는 것이 내 소심한 반항이었다. 상이 엎어지고, 방문이 거세게 닫히고, 작은 형의 술취한 목소리가 내 마음을 휘저었다. 수업을 마치면 운동장 나무 그늘 아래 팔베개를 하고 누웠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좋았다. 따뜻했다. 그러나 집에 오면 새어머니를 도와 피아노 레슨을 해야 했다. 화단에 물을 주고, 방과 거실을 닦아야 했다. 마음 둘 곳 없는 집이 싫었다. 외로웠다. 많이... 우리 가족은 겉으로는 멀쩡했다. 그러나 행복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진짜 마음이 궁금했다.
돌아가신 엄마에 대한 기억은 암 투병으로 입원한 엄마를 찾아갔을 때가 전부였다. 집안 일을 하던 누나의 등에 업혀서 병실에 들어갔다. "지수야!" 아픈 엄마의 희미한 음성이 어색해 고개를 돌렸다. 나는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것 같았다. 어른이 되어 상담을 받으며 한 조각 기억을 찾았다. 한옥집 툇마루에 앉은 엄마와 나. 우리는 밥상에 마주 보고 앉았다. 엄마는 암 투병 중에도 물에 밥을 말아 숟가락에 떠서 내게 먹이려고 하셨다. 나는 엄마에게 사랑받았던 소중한 사람이었던 거다. 그리고 나도 누군가를 사랑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놀라운 변화였다.
"우리나라에서 네가 하려는 일을 하려면 의대에 가서 정신과 의사가 되는 것이 맞아" 당시 의사였던 큰형의 조언이었다. 이과를 선택했다. 아뿔싸! 수학과 과학이 재미없다. 수업 중 교과서 뒤에 소설책을 놓고 읽기 시작했다. 성적이 미끄럼틀을 탔다. 점수에 맞춰 대학과 학과를 선택했다.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용돈을 벌었다. 개봉관에 가서 영화를 보고, 연극과 무용 등의 무대예술을 접하기 시작했다. 졸업을 앞두고 압구정동에 위치한 의류회사에 취업했다. 상품기획을 담당하면서 바쁠 때는 밤새워 일했다. 시즌의 상품을 소개하는 쇼가 끝나 잠시 한가하던 때, 대학로에서 '에쿠우스'란 연극을 봤다. 커튼콜에 등장한 배우는 극의 주인공인 '알렌'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 관객을 향해 인사를 했다. 역할에 빠져 있는 배우가 마냥 멋있었다. 나도 무언가에 미치고 싶었다. 그리고 한 번은 무대에 서고 싶은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다.
대학로 전봇대에 붙은 뮤지컬 배우 오디션 포스터를 봤다. 재미 삼아 본 오디션에 덜컥 붙었다. 사표를 냈다. 사장님이 6개월 휴직으로 처리해 주셨다. 대학로에서 연습을 시작했다. 한쪽 발을 곧추세우고 두 바퀴를 도는 TWO-TURN 동작이 혼자만 안되었다. 모두가 가고 난 뒤 연습실에 남아서 연습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서울예대를 졸업한 동생이 재밌는 제안을 했다.
"형, 내가 춤의 기본인 발레를 가르쳐 줄게. 형은 내게 피아노를 가르쳐 줘요"
연습이 끝나고 서로를 레슨 해주었다. 주말에도 연습실에 나왔다. 다리 찢기의 고통을 참으며 춤을 배웠다.
"지수야, 미안하다. 직원을 40% 감원하게 되었다. " 지방 공연을 마치고 찾아간 회사의 사장님이 말씀하셨다. IMF가 터졌다. 그러나 뚯밖에 찾아온 행운. 명성황후 미국 공연 오디션에 합격했다. 29, 30살의 나는 노래하며 춤추며 뮤지컬 단역배우로 살았다. 땀이 비 오듯 했던 연습과 공연 직전의 짜릿한 긴장감, 공연 장소였던 뉴욕과 L.A를 즐겼다. 그러나 뮤지컬은 재미 삼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노력에 노력을 해야했고, 경제적인 어려움도 감수해야 했다. 탁월한 기량과 뛰어난 외모의 배우들을 보며 또 다른 길을 선택했다.
뮤지컬을 관두고 어린이 영어강사, 스포츠 의류 MD. 특수교육과 편입과 졸업. 사립학교와 대안학교에서의 특수교사 등 다양한 일들을 경험했다. 노래하며 춤추며 영어를 가르쳤고, 회사를 다닐 때는 지하철을 기다리면서 복도를 걸으면서 살짝살짝 춤을 췄다. 특수교사를 할 때는 음악을 전담하며 교과서 노래에 율동을 만들어 가르치며 상담을 공부했다. 50세에 임용고시를 보고 상담교사가 되어 상담실에서 아이들의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눈다.
나는 '춤추는 카운슬러'를 꿈꾼다. 나를 만나는 아이들이 인생이란 무대에서 자유롭게 춤췄으면 좋겠다. 칼군무 대신 자신만의 몸짓을 표현하는 아이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여전히 지하철을 기다리면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티 나지 않게 춤을 춘다. 화제의 드라마 '나빌레라'의 주인공 '덕출'은 70세에 발레를 배운다. 춤추는 70세. 너무도 멋지지 않은가?
누군가가 탄천에서 춤추듯 걷고, 살짝 멈춰 서서 손으로 웨이브를 하고 있다면 그는 '춤추는 카운슬러' , '나'다.
여러분도 저와 함께 춤추지 않으실래요?
Shall we da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