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야기 Apr 19. 2020

야기하는 책_이렇게 하루하루 살다보면 세상도 바뀌겠지

여성환경연대 기획 <이렇게 하루하루 살다보면 세상도 바뀌겠지> 서평 

      

어렸을 때 경시하던 가치관의 힘을 깨닫는 순간이 있다. 정의라던가 다정함이라던가, 공존 같은 것. 내가 막 가치관을 형성할 무렵 티브이 예능엔 ‘무한 이기주의’라는 말이 유머가 되어 돌아다녔고 ‘자기 밥그릇 못 챙기는’ 사람을 힐난하는 게 당연시되며 창작물에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살피지 않고 자기 멋대로 구는 건 ‘쿨’하게 여겨졌다.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아서, 선하고 따뜻한 인물보다는 차갑고 조금은 못된 인물에게 더 마음이 기울었다. 창작물을 소비하는 기호를 떠나서 그런 인간상을 동경했다는 뜻이다. 나 하나만 잘하면 되지, 부조리와 불평등은 내가 잘하면 해결될 일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가 잘하면, 나만 잘하면. 


나만 잘하면 해결될 일이라니, 이걸 성과주의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나 하나 잘한다’는 전제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버렸다. 특별한 계기는 없었지만 그저, 소수자성을 띤 채, 내가 가진 기득권과 약자성을 깨달아버렸으니 모를 수가 없지 않은가. 어떤 사회 구성원도 자신이 가진 성별과 학력과 소득수준과 장애 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이 평지인지 진창인지 아스팔트인지 정비되지 않은 산길인지는 우리의 순수한 노력에 의해서만 결정한다. 애당초 그 ‘노력’을 할 수 있는 환경 역시 개인이 뒤집어야 한다고 방조하는 게 얼마나 같잖고 어이없는가. 특출난 소수의 성공담을 팔며 ‘너희도 할 수 있어. 그걸 해내지 못한다면 그건 니 의지가 부족해서야’라고 매도하는 사람들과 그 성공담을 보며 ‘차별이 어딨냐. 오히려 저런 혜택이 우리에게 역차별이다.’를 부르짖는 사람들, 그런 이와 같은 하늘 아래 산소를 공유하며 살아야 한다는 게 조금 끔찍하기도 하지만, 아무튼. 



그런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고 해치지 않는, 해쳐지지 않으며 살아가는 건 좀 어려운 일이다. 솔직히 나 혼자만의 힘으로 완벽하게 이룰 수 있는 일도 아니다. 흔들리더라도, 휘영청 흔들려가면서도 최대한 다른 존재를 해치지 않길, 나를 해치지 않길 바라며 조금 조금씩 노력하면서도 가끔은 신경을 세워 바꿔나가고자 하는 것, 그 자체가 지칠 때가 있다. 게다가 ‘그런 거 나는 절대 못 해’라고 단정하는 목소리를 들으면 더더욱 힘이 빠진다. 


연대, 연대가 필요해. 나랑 비슷한 태도로 삶을 바라보고 일상에서 작은 실천을 꾀하는 이들의 존재가 필요하다. 정확히는 그런 존재가 있음을 느끼고 싶다. 그런 당신, 「이렇게 하루하루 살다보면 세상도 바뀌겠지」는 읽어 보았는가?     






앞서 말했다시피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엔 한계가 있다. 다양한 층위를 쌓으며 살아가는 인간이 모든 장벽을 없는 셈 치고 ‘공평하게’ 생존할 수 있는 공간은 판타지물에서나 존재할까. 물론 그런 판타지물, 본 적은 없지만. 


책의 챕터는 만연하고 당연하게 무시되어 왔던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몸 다양성, 장애, 퀴어, 번아웃, 자존감, 기본소득, 동물권, 돌봄. 언제나 우리 사회에 존재하지만 다루어지지 않은 이야기들. 왜, 그런 말 있지 않은가. ‘겨우 그 정도로 힘들면 나도 우울증/번아웃이다’. 회사에 다닐 때 들은 말을 곱씹으며 나는 울분을 토했다. ‘그러면 사회 전체가 다 우울증인 거지. 그러면 다 맛이 가 있다는 거잖아! 아픈데 사람 갈아가며 일하는 게 제대로 된 거야?’ 


우리는 당연하게 과로하고 당연하게 ‘아프지 않은’, ‘장애가 없는’ 몸을 전제하며 성적 지향과 성 정체성을 단일화하는 데다 당연하게 비인간동물을 먹는다. 이쯤 되면 대체 당연한 게 뭔가 하는 의구심과 함께 환멸이 든다. ‘다들 그렇잖아. 뭘 그런 걸 일일이 따져’라는 말을 들으면 ‘노예제도 합법이었다’는 대답밖에 생각이 안 나지만…….


 ‘다 그런다’는 게 불변의 진리는 아니다. ‘원래 그렇다’는 게 해답이 될 순 없다. ‘이미 충분하다’, 당신은 그 여부를 가름할 권리가 없다.


챕터를 하나하나 곱씹으며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러면 전부를 말해버릴 것만 같아 조심스럽다. 책을 읽으면서 몇몇 친구가 떠올랐다. 혐오를 답습한 말에 제대로 반박하지 못하고 화제를 전환하기만 했던 순간도 떠올랐다. 몰이해를 무기로 삼아 너무나 쉽게 누군가를 부정하던 목소리와 자신의 게으름을 내세워 변하지 않을 것을 선택한 사람, 한 사람을 특정한 집단으로만 카테고리화해 비난하던 맹렬함. 



무결할 수도 완벽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지할 수도 무심할 수도 없고. 그러니까 우리는 조금 번거롭고 귀찮고 약간은 뿌듯한 마음으로 일상을 바꿔나가고 있는 거다. 채식을 하고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고 나와 관련 없는 삶을 공부하고 지워진 이야기를 해독하고. 그러다가 외로워지면 나처럼, 나보다 먼저, 꾸준히 애쓰고 있는 사람들을 알고 싶어지는 거다. 그런 우리에게 조금 힘을 빼는 마음으로, 흔들리고 있을 때 조금 힘을 주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는 거다. 그러면 첫 장부터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라는, 내가 계속해왔던 의문을 똑같이 던지는 목소리를 만날 테고, 조금 덜 외로워질 테니까. 



작가의 이전글 야기하는 책_깨끗한 존경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