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겨울매미 Jan 05. 2024

세상 한가운데서

두려움 너머

* <공동선> 제174호 ‘두려움 너머’ 꼭지에 게재된 글입니다.


1.


     멀리 떠나고 싶었다. 온갖 아우성과 진흙탕으로부터 가능한 한 먼 곳으로, 모든 걸 다 뿌리치고 도망가고 싶었다. 이 더러운 세상에서 벗어나, 하느님 품에 폭 파묻혀 살다 가고 싶었다. 세속의 손이 못 미치는 깊은 골짜기에 머무르며, 기도와 고독 속에 살다 가리라 결심했다.


     카르투시오 수도원 입회를 간절히 소망했다. 그리고 나의 소망대로 일이 이루어지는 듯했다. 2013년 2월, 나는 이미 수련장 수녀님으로부터 몇 월 며칟날 짐 싸서 들어오면 된다는 메시지까지 받은 상태였다. 수년간 간절히 꿈꾸며 준비해 온 일이 현실로 다가와 있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토록 원하던 수도원 입회가 눈앞으로 다가왔는데 자꾸만 마음에 걸리는 뭔가가 있었다. 이 길이 내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하면서도, 다시 확인해 봐야만 할 것 같은 강한 느낌이 나를 붙잡았다. 몸살 나도록 고민한 끝에 결국, 나 자신에게 일 년의 유예 기간을 주기로 했다.

     당시 나는 고등학교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스스로 유예 기간으로 부여한 일 년 동안 고3 담임을 했다. 그 어느 해보다 치열하고 바쁘게 한 해를 살고 난 뒤, 2014년 1월, 프랑스로 떠났다. 보은 카르투시오 수도원의 모원(母院)인 프랑스 카르투시오 수도원의 총원장 수녀님께 면담 신청을 해 놓은 상태였다.

     아비뇽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 날 새벽 시외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려 어느 시골 정류장에 내렸다. 거기까지 나를 픽업하러 오신 아주머니의 차로 수도원에 갔고, 수도원 응접실에서 연세 지긋하신 총원장 수녀님을 만났다.

     한 시간여의 대화 끝에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무언가를 깨달은 상태였다. 내게는 세상 한가운데서 살며 꼭 배워야만 할 뭔가가 있고, 세상 한가운데서의 삶이 수도원에서의 삶보다 결코 덜 고귀하지 않구나. 이 면담 덕분에 나는 ‘세상’에 남았다.

2.

     이후 나의 삶은, 한때 그토록 피하고 싶어 했던 세상 한가운데로 점점 더 깊숙이 뻗어 온 듯하다.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하던 시절 내가 가졌던 생각, 즉, 나는 원래 여기 살 사람이 아닌데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잠깐 얹혀살고 있다는, 나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순수한 사람이라 이 세상에 적응해 살기 참 힘들다는 식의 생각은 깨끗이 사라졌다.

     사람들과 만나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고 장난치고 수다 떠는 일이 진정으로 즐거워졌다. 그러면서 비로소 정말로 ‘사랑’을 하게 되었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이 어떤 뜻인지 아주 조금 알 것 같았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 사이에 계시다’는 말이 어떤 뜻인지도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게 되었다.

     전에는 마치 남의 일을 대신 희생해서 해 주기라도 하듯 힘들게만 여겼던 교사로서의 일이 비로소 진심으로 ‘나의 일’로 여겨졌다. 그러다 보니 주인 의식도 생겼고, 이 일터를 좀 더 일할 만한 곳으로 가꾸어 갈 책임이 바로 나에게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책임을 외면하고 싶지 않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가입했다. 단체협약 불이행 사항을 두고 학교장과 팽팽하게 맞서기도 하고, 학교장의 권위적이고 시대착오적인 학교 운영에 반대해 회의 시간에 학교장과 맞장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2023년 7월 서이초등학교 선생님이 안타깝게 돌아가신 후, 토요일마다 서울 도심에서는, 특정 교원단체가 주관하는 것이 아닌 ‘검은 점’으로서의 교사 개인들이 모여 이룬, 교육권 확보를 위한 집회가 열렸다. 서이초등학교 선생님의 일이 도저히 남의 일로 여겨지지 않아 마음이 많이 아팠던 나도, 시간이 허락하는 한 이 집회들에 참석했다.

     그러던 중 서이초등학교 선생님의 49재인 9월 4일 공교육 멈춤의 날을 앞두고 교육부는 파면, 해임, 형사고발 운운하며 교사들을 겁박했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마침, 9월 4일에 서울 집회까지 가기 힘든 선생님들을 위해 지역 집회를 열면 좋겠다는 논의가 있었고, 충청권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세종시 교육부 청사 앞에서 집회가 열리게 됐다. 나도 이 집회의 운영진으로 참여해, 보도 자료를 쓰고, 기자들과 소통하고, 성명문을 작성했다.

     9월 16일 국회 앞 집회의 운영진으로도 일했다. 당시는 교원지위법, 초․중등교육법, 유아교육법, 교육기본법 등 교권4법의 개정안 통과를 눈앞에 둔 시기였던 만큼, 집회 때 무대에 올라, 지금까지의 투쟁에 대해 경과보고를 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논했다. 이 발언 중 교육부 장관, 일부 교육감 및 학교장의 행태를 신랄히 비판해 집회 참가자분들로부터 열렬한 호응을 얻기도 했다.

     그리고 최근, 전교조 충북지부 음성지회장 및 전국대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지회원들과의 활발한 소통과 촘촘한 현안 대응을 통해 교육 여건을 개선하는 일을 하고 싶어서였다. 나보다 훌륭한 활동가분들이 지회 안에 계시지만, 나도 이 일을 하고 싶었다.

     2주 정도의 선거운동 기간 동안 최대한 시간을 낸 결과, 26개 분회를 방문할 수 있었다. 조합원들 한 분 한 분께 직접 쓴 손편지를 전달하고 현장의 고충을 새겨들었다. 그리고 투표 결과는 음성지회장과 전국대의원 모두 당선. 이제 내 앞엔 더 바쁘고 더 치열할, 더 싸우고 더 상처 입고 그리고 더 호탕하게 웃을 한 해가 펼쳐져 있다.

3.

     세속의 모든 일에서 벗어나 하느님 품에 안겨 착하고 평화롭게 살겠다고 마음먹은 때가 있었다. 정치란 관심을 끊어야 할 지저분한 일이라 여기고, 전교조 활동을 열심히 하시는 선배 선생님들을 보면서 저분들은 영원하지도 않은 일에 어쩌면 저렇게 열심일 수 있을까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그때의 나 자신이 부끄럽다.

     내가 수도원에서, 성당에서, 미사와 책들 속에서 간절히 찾아 헤매던 하느님이 이 세상 한가운데 사람들 사이에, 복닥복닥하고 구질구질한 일상 속에 계신 걸 늦게야 알아보았다. 내가 지금 마주하고 있고 헤쳐 나가야 할 지극히 구체적인 현실 문제 하나하나가 바로 하느님의 일인 걸 늦게나마 깨달았다.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이 아니라 해도, 지금 살고 있으니 일단은 여기가 ‘우리 집’ 아닌가. 우리 집이 살아갈 만한 곳이 되도록, 우리 집에 억울한 식구가 생기지 않도록, 우리 집에 부당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살피고 챙기는 건 어른의 당연한 일. 그런 점에서 볼 때, 사회의 여러 문제에, 그중에서도 특히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든 참여하려 애쓰기 시작한 때부터 나는 비로소 어른다워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세상 한가운데서 하루를 시작한다. 더 이상 도망치려 하지 않고, 다만 단단히 무장을 한다. 오늘은 오늘의 전투가 펼쳐지고, 나는 꾸물대지 않는다. 영원한 것을 찾느라고 현실을 외면하는 일은 이제 없다. 순간순간 마주하는 현실 속에 풍덩 뛰어들어 후회 없이 싸운다. 저항하고 도전한다. 울고 웃고 사랑한다. 오늘도 세상 한가운데서 하느님을 만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