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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매미 Jun 20. 2024

괜찮은 순간들을 위하여

현경이랑 세상 읽기

* ‘인권연대 숨’ 소식지 2024년 6월호 ‘현경이랑 세상 읽기’ 꼭지에 게재된 글입니다.


제목: 괜찮은 순간들을 위하여 / 글쓴이: 박현경(화가, 교사)

 

 1.

괜찮은 순간들이 있다.


이를테면, 새벽에 커피를 홀짝이며 종이에 크레용 선을 그을 때. 어제저녁 푸르게 물들여 놓은 종이 위에 흰색 선을 반복해서 긋는 동안, 도톰한 종이와 단단한 크레용이 마주치는 그 질감이 기분 좋게 몸에 전해지고, 창밖이 서서히 밝아 오는 그 시간. 새들이 재잘대는 그 시간.


무사히 퇴근. 저녁에 다른 스케줄이 없어 다행인 날. 학교를 빠져나와 편의점에만 들렀다가 곧장 관사(官舍) 방으로 직행. 아침에 작업하던 그림 앞으로. 출근 전 멈춘 지점에서부터 그리기 시작. 창밖 밝았던 하늘이 어두워지도록, 그렇게 작업하며 하루를 마무리하기.


토요일, 아침 아홉 시부터 저녁 아홉 시까지 꼼짝없이 작업실에 틀어박혀 작업을 할 때. 낮게 깔린 음악 사이로 집 앞 골목길을 지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두런두런 섞이고, 크레용 선을 긋고 또 긋는 사이, 내 머릿속에만 존재했던 색깔과 모양이 눈앞에 천천히 몸을 드러내는 시간. 고양이 왕순이랑 봉순이는 기분 좋게 갸르릉갸르릉 하고, 손가락도 아프고 팔도 아파 이제는 좀 쉬어야지 생각하며 작업대에서 물러나 기대어 앉으면 문득, 창밖 어둠 속 가로등 불빛이 주황색으로 빛나는, 그런 저녁.


2.

일기장과 메모들을 뒤져 보니, 지난 4월 하순부터 계속해서 나는 나 자신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구나. 나 힘들다고, 두렵고 불안하다고, 쉬고 싶다고.


‘내 마음이 왜 이리 슬픈 걸까? 누군가 툭 하고 건드리면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 내가 지친 것일까? 그저 어딘가에 처박히고만 싶다. 그림 그리고 싶다. 잠이 부족해서일까? 그동안 너무 바빴기 때문일까? 숨고 싶고 잠들고 싶은 날이다.’

‘요즘 마음이 불안하고 예민하다. 그렇다는 걸 아니 스스로 조심하자.’

‘나 마음이 너무 안 좋아. 그냥 쉬고 싶어. 이제 그만하고 싶어.’

‘혼란스럽다. 그리고 제발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한다.’


그런 가운데 여지없이 시간은 흐르고, 오지 않았으면 했던 ‘내일’이 오고, 나는 또 출근하여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사람들을 만나고, 수업을 하고, 뚝딱뚝딱 행정 업무를 처리하고, 머리를 짜 내 가며 정책협의회를 준비하고, 일들이 잘 안 될까 봐 고심하고, 또 고심하고, 검토한 서류를 검토하고, 또 검토하고, 그렇게 간신히 오늘에 이르렀다.


나만 이런 게 아닐 것이다. 참 많은 사람들이 간신히 버티고 있다는 걸 안다. 나보다 훨씬 더 바쁘고 지치고 힘든데 버티고 있는 동지들이 있다는 걸 안다. 그분들 앞에서 이 글은 치기 어린 연약한 소리에 불과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게서 들려오는 살려 달라는 소리를 못 들은 척할 수 없다. 어떤 힘든 사람이 간곡히 도와달라고 하면 그 사람 말에 귀를 기울이고 할 수 있는 한 도와주는 것이 인지상정인 것처럼, 내가 나한테 힘들다고 할 때도 도와줘야 한다. 다른 누구보다도 내가 먼저 나서서 나를 도와줘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 내가 나를 방치하면, 나는 그냥 혼자 힘들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남들에게도 위험하고 해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 (너무 힘들고 소진되어 자기도 모르게 주위 사람들에게 공격적이고 짜증스러운 언행을 해 본 사람이라면 이게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을 돕고 싶은 사람일수록 더더욱, 스스로를 먼저 돌봐야 한다. 사람들에게 힘이 되기 위해 열심히 활동하느라 스스로를 쥐어짠 나머지 소진돼, 오히려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존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3.

이른바 중요한 일들을 위해 일상의 ‘괜찮은 순간들’을 생략하고 생략하고 생략하다 보면 삶이 안 괜찮아지고 나도 안 괜찮은 존재가 된다는 걸 깨달았다. 이게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꽤 많은 사람에게 해당하는 사실이라는 건 안다. 적어도 나 자신에게는 너무나 확실히 작동하는 원리라는 걸 요 몇 달 간의 경험을 통해 체감했다.


나에게 ‘괜찮은 순간들’은 그림 그리는 순간들이다. 어느 날 하루 날 잡아서가 아니라 일상적으로 그리는 순간들이다. 새벽에, 저녁에, 주말에, 밥 먹듯, 약 챙겨 먹듯, 호흡하듯 그림 그리는 순간들이다. 사람들에게, 조직에, 사회에 더 도움이 되고 싶어 이 순간들을 자꾸 스킵했더니, 금세 나는 남에게 도움을 주기 힘들 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지키기 힘든 상태가 되었다. 이걸 겪어 보았으면서 또 나 자신을 가지고 실험을 한다는 건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그래서 이제 그 ‘괜찮은 순간들’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내가 나를 꼬박꼬박 챙겨 주려 한다. 해가 뜨고 하늘이 밝아져 오는 동안, 또는, 어둑어둑 어둠이 깔리는 동안, 묵묵히 선을 긋고 색을 입히다가 한 걸음 물러서 바라보고 또 다가서고 다시 선을 긋는 그 모든 ‘괜찮은 순간들’ 속에서, 나는 비로소 괜찮다. 살아 있다.


그림_박현경, 천사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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