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은 탔지만 에너지를 얻었다.
반복적인 무탈한 일상은 속 편한 평탄한 삶을 의미하면서도 어떻게 보면 지루하고 정적인 삶을 의미한다. 요즘 나의 무탈한 일상은 지루하고 정적이게 느껴지던 참이었다.
지루함을 탈피하기 위해서 하는 방법들이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는 가보지 않은 새로운 장소를 가는 것이다. 여행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여행보다 오감 전체를 증폭시킬 수 있는 곳인 페스티벌을 오랜만에 갔다.
평소에도 직접 경험 예찬론자이기에 페스티벌을 자주 간다. 올해 첫 페스티벌은 3월에 갔던 ‘2024 Soundberry Theater'였다. 3월이어서 낮에는 따뜻했지만 밤에는 쌀쌀한 날씨여서 실외가 아닌 실내 공연이었다. 실내여서 그런지 사운드는 명료하게 들렸지만 실내인 게 아쉽기는 했다. 야외에서 즐겼다면 더욱 활기차게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올해 두 번째 페스티벌이자 첫 야외 페스티벌인 ‘Peak Festival 2024’를 갔다. 사실 페스티벌의 이름에서 눈치를 챘어야 하지만 별 생각이 없었다. 라인업을 보고도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많이 나오네 정도였다. 근데 알고 보니 락 페스티벌을 표방하는 페스티벌이었다. 그래서 이름이 기타 피크에서 따온 ‘Peak’ 페스티벌이었던 것이다. 라인업도 다시 보니 전체가 다 락 밴드였다. 페스티벌을 가니 깃발들이 휘날렸고 다시금 느꼈다. 이건 락 페스티벌이구나.
야외 공연이라 그런지 역시나 에너지가 넘쳤다. 낮에는 날씨가 생각보다 덥기는 했지만 별수 없이 이겨냈어야 했다. 살은 타버렸지만 그만큼 에너지를 얻고 왔다. 인상 깊었던 공연들도 많았고 역시 집채만 한 스피커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타 리프는 뇌를 진동시킨다.
특히 인상 깊었던 아티스트와 공연
01. 마치(MRCH)
마치라는 밴드를 알지는 못했다. 이번 페스티벌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틀 동안 진행된 아티스트들 중에 ‘제일 무대를 즐기고 제일 행복해 보였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마치에게 있어 첫 페스티벌 참가였기 때문이다. 드디어 페스티벌 무대를 밟아본다는 소감과 함께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라이브도 훌륭했고 특히 무대매너가 가식 없이 순수해 보여서 좋았다. 진정으로 본인의 공연을 즐기는 아티스트가 곧 팬들에게도 긍정적인 에너지를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02. 크라잉넛 (CRYING NUT)CeCeRYING NU
관록은 무시 못한다는 걸 보여준 락 밴드.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말달리자'와 '룩셈브루크'는 역시 사람들을 미치게 만든다. 내년이 데뷔 30주년이라는데 녹슬지 않은 카리스마와 에너지가 장난이 아니었다. 당시에 사람들의 미친듯한 열기와 날씨가 겹쳐져서 결국 너무 더워서 스텐딩에서 나올 정도였다.
사람들은 광기에 휩싸였고 저 멀리서 슬램을 하는 사람들의 모래폭풍을 보고 실감했다. 이 사람들은 다 진심이구나.
03. 넬(NELL)
첫째 날의 헤드라이너, 해가 지고 완벽한 온도와 날씨에서 울려 퍼진 넬의 기타 리프는 황홀했다. 경이로웠다. 우선 첫곡부터 Still Sunset을 연주해서 행복했다. 전광판이 노을빛으로 변하고 Still Sunset 전주가 나올 때의 쾌감은 잊지 못한다. 퇴근할 때마다 자주 듣는 노래인데 이걸 드디어 라이브로 듣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이외에도 폭발적인 사운드와 함께 섬세하게 울려 퍼지는 넬의 보컬은 첫째 날을 선명하게 마무리하게 만들었다.
‘기억을 걷는 시간’의 도입분인 ‘아직도’라는 세 글자를 기다리게 만드는, 명불허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밴드이다.
04. 글랜체크(GLEN CHECK)
신스팝 장르를 제일 좋아했던 시절은 고등학생 때부터 대학교 2학년까지였다. 당시에 신스팝 아티스트들을 많이 찾아서 들었고 플레이리스트에 담긴 한국 아티스트 중 하나가 글랜체크였다.
글랜체크는 밴드의 프런트맨이 ‘멋’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준다. 비주얼적으로 잘생겼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태’가 나는, 독보적인 아우라가 있는 것을 의미한다. 공연에 나왔을 때 세련된 선글라스와 함께 무심하게 파란색 아디다스 트랙슈트 상의를 입고 간간히 몇 마디 멘트만 뱉고 묵묵히 연주만 하는 모습이 진짜 멋있었다.
스피커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스팝의 형형색색 사운드는 참으로 세련되었다.
05. 이디오테잎(IDIOTAPE)
피크 페스티벌을 온 목적 중 하나이다. 나의 학창 시절을 책임져준 이디오테잎의 라이브를 보기 위해서이다. 드디어 영접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원래 기대가 너무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 하지만 역시나 기대 이상의 미친듯한 사운드는 피크 페스티벌 첫 슬램을 경험하게 했다.
장르 특성도 있긴 하겠지만 역시나 아무 멘트 없이 공연을 사운드로만 꽉꽉 채웠다. 학상치절 이어폰으로 듣던 전자음을 거대한 스피커를 통해 들으니 이것이 바로 직접 경험의 묘미라는 것을 제대로 느꼈다. IDIOTAPE랄 적혀있는 검정 깃발이 참으로 웅장하더라. 전주를 들으면 자동으로 몸이 반응하는.
06. 김윤아
락 페스티벌답게 하루종일 사운드가 휘몰아쳤고 드디어 김윤아의 차례가 왔다. 두 번째 날의 헤드라이너이면서 피크 페스티벌의 마지막을 장식한 김윤아. 예전에 자우림의 라이브를 봤서 김윤아의 라이브를 처음 보는 것은 아니지만 이날의 공연은 완전 느낌이 달랐다. 한 편의 뮤지컬을 본 느낌이었다.
느낌이 다른 이유는 하나였다. 자우림의 공연은 다양한 히트곡들의 나열이었다면 이번 김윤아의 공연은 서사가 완벽하게 구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숨죽이듯이 지켜봤고 감탄했다. '고혹하다'는 단어가 김윤아의 음색을 표현해 주었다. 모든 것을 통달한 철학자가 음악이라는 도구를 통해 들려주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페스티벌은 끝이 났다. 허무함도 느끼지 못하고 다음날에 바로 출근을 했다. 신기하게도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살은 탔지만 직접 피부로 느낀 에너지는 참으로 귀했다. 이 에너지를 원동력으로 하루를 버티다 방전되면 또 다른 페스티벌을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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