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은 초등학교에서 일어난 학대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어머니, 선생님, 아이의 입장 3부분으로 보여주면서 사건의 전말을 하나씩 관객에게 보여준다. 진짜 괴물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다.
영화에선 ‘누가 괴물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며 소수자를 괴물처럼 바라보고 배척하는 세태를 지적하는 동시에 그런 소수자를 배려하지 않는 행동과 말로 잔혹하게 상처를 주는 보통의 다수를 비판한다.
영화는 분명 소수자를 대하는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있지만, 동시에 미래나 환생해서가 아닌, 현재 행복하기 위한 태도에 대해 말한다. 나를 포함한 도처에 모두 괴물인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괴물’은 왠지 그 어감상 엄청나야 할 것 같지만, 사전적인 뜻만 놓고 봤을 땐 대단치 않다. 괴이한 것인데, ‘괴이하다’는 ‘정상적이지 않고 별나며 괴상하다.’는 뜻이다. 쉽게 말하면 대다수의 사람과 다른 구석이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모두가 괴물이다. ‘뭐 저런 사람을 좋아하지?’, ‘식성 별나네’, ‘특이하게 말하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하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에 대해 할 수 있는 생각이다. 상대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다면, 모르겠지만 한 사람의 모든 것을 안다고 가정할 때, 온전한 나로서 절대 이해되지 못할 것은 하나쯤 있다.
인간은 ‘무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생긴다. 파악하지 못하면, 자기 존재가 어떻게 될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개념이 있고, 그 미래 언젠가는 자기 존재의 소멸이 있다는 것을 아는 인간에게 미래는 곧 두려움이다. 미래라는 개념은 한 치 앞도 볼 수 없다. 개념은 알지만 파악할 수 없는 모순은 마치 극단적으로 비유하면 사형수의 심정과 같다.
언젠가 죽음이 다가올 것을 알지만, 동시에 모르는 것. 그런 모순된 상황을 이겨내는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또 다른 ‘무지’다. 그 끝을 의식하지 않고 현재를 살아나면 된다.
괴물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괴물을 특정하고 배척하는 건, ‘무지’를 견디지 못하는 인간 본능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그 괴물을 배척하는 세상을 만든 본인이 또 다른 기준에 의해 괴물로 분류될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 괴물 세상을 사는 법은 누가 괴물인가를 나누고 가두는 것에 있지 않다. 너도나도 태어난 그대로 서로에게 괴물로 사는 거다. 누군가를 괴물로 규정하고 공격하는 건 곧 누군가에게 괴물로 보일 나에게 창끝을 겨누는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