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가여운 것들>에서 가장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혼종’이다. 외과 의사 갓윈의 집에는 머리는 오리, 몸은 개이거나 돼지머리를 단 닭이 산다. 마차가 등장하지만 흡사 케이블카처럼 전선에 매달려 가는 미래형 대중교통도 등장하고 호화로운 여객선도 나온다. 외과의사 갓윈에게 자신이 임신한 태아의 뇌를 이식받은 벨라의 삶에는 상류사회와 매음굴의 삶이 공존한다. 그녀의 삶 역시 혼종이다. 그런 벨라 삶의 여정과 모험을 따라가며 영화는 세상 곳곳의 혼종에게 위로를 건넨다.
영화에서 드러나는 기이한 ‘혼종’의 모습은 단순히 영화적 상상력을 통한 흥밋거리만은 아니다. 세상과 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 생물들의 적확한 묘사에 가깝다. 벨라가 여행 도중 들른 호화로운 호텔 아래에는 사람들이 굶어 죽어간다. 세상에는 영양 과다로 비만해 병에 걸려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는 권태로움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고 아등바등 살아남으려고 하지만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도 한다. 영화에 드러나는 기이한 혼종은 영화에만 머물지 않는다.
영화는 이런 혼종을 보듬고 품는 과정을 그린다. 가여운 ‘나’에서 가여운 ‘것들’로, 연민의 확장이 드러난다. 연민이 퍼진 그 세상엔 혼종이라는 이유로 ‘괴물’로 불리지 않는다. 그냥 그 자체일 뿐이다. 이 확장성이 위로가 되는 이유는 엄밀히 말해서 모든 사람과 사물은 혼종이기 때문이다. 개인은 각자 다른 피와 혈관 지문을 가지고 있는 만큼 내면에는 무수히 다른 성향과 생각, 특별한 성적 취향 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서로 일치할 확률이 없는 만큼 모두는 하나뿐인 기이한 혼종이다.
영화는 그런 혼종들이 서로를 증오하고 배척하지 않게되는 과정을 그린다. 그건 특별한 갈등도 해결책도 아닌, 마법과도 같이 나타난다. 영화에선 그 마법을 벨라가 모험을 겪고 성숙하면서 배우는 감정인 ‘연민’으로 묘사한다. ‘가여운 벨라’에서 ‘가여운 것들’로 확장되는 과정이다.
영화 초반에 벨라는 갓윈에게 자신의 부모가 여행 도중 목숨을 잃었고 혼자 남은 자신을 '가여운 벨라'라고 말하며 자기 연민을 드러낸다. 그런 벨라가 '가여운 것들'로 말하는 지점은 세상의 수많은 혼종을 직접 보고 배우며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나서다. 그 배움은 전문적인 지식이나 지혜가 아니라 ‘연민’이라는 마음으로 나타난다.
영화에는 기이한 설정과 폭력적인 장면이 아무렇지 않게 등장한다. 그러면서도 영화를 보고 나선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따뜻해진다. 그 이유는 영화가 외적으로 드러나는 방식은 결국 빙산의 일각일 뿐 혼종에 대한 위로와 연민이 더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형식은 영화 내적으로도 나타난다.
‘괴물’로 불리는 갓윈에게 연민과 동정심을 벨라가 성장할 수 있도록 한 것. 그리하여 천성이 잔혹하고 무자비했던 벨라가 역시 다른 혼종에게 연민을 품는 사람으로 된다. 자기가 임신한 태아의 뇌를 자신을 만든 갓윈에게도 증오 대신 연민을 품는다. 저주스러운 운명을 만들어낸 창조주를 원망하지 않고 도리어 그런 창조주에게도 연민을 품고 스스로 운명의 주인이 되는 주체적인 과정이 드러나는 것이다.
갓윈 역시 그 아버지에게 실험 대상으로 난도질을 당하고 평생 몸이 불편한 채로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이 보기에 괴상한 혼종 같아 보여도 그 운명을 저주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또 그 역시 벨라에겐 창조주가 되어 기이한 일을 벌이지만 벨라 역시 그를 받아들인다.
“언제나 연민을 가지고 수술해라”
죽어가는 갓윈이 의사가 되겠다고 하는 벨라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했던 말을 전해준다.
갓윈의 아버지와 갓윈, 벨라가 자신을 만든 창조주를 원망하지 않고 운명을 또 자신의 진취적으로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동력이 무엇인지 드러난다. ‘연민’이다.
생존하기 위한 동력으로 작용하는 자기 연민이 그 자신에게만 머물지 않고 타인에게 확대되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과 세상을 이해하게 하고 자신에게 돌아와 그 운명을 확장하는 셈이다.
‘연민’, 말로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무수한 혼종들, 그리고 역시 그 혼종들 가운데 하나인 나를 받아들이며 살게 하는 힘이다. 영화는 모든 혼종에게 그 힘을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