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자”
아버지는 음언니가 혼자 방에 있는 걸 가만 못 두는 편이다. 음언니가 방에서 곤히 잠든 것만 아니라면, 온갖 이불과 매트에 가로막힌 음언니 방문을 활짝 열어두고서는 거실로 음언니를 데려온다. 음언니가 누워있든 말든 관계없다. 어떤 때는 자고 있어도 헤기 중천에 뜬 낮이라면 깨워서 거실로 내오기도 한다. 음언니가 밤새 뭘 했든 말든 관계없어 보인다.
비슷한 경우, 나는 음언니가 분명히 나가고 싶어 할 때만 거실로 데려온다. 음언니가 엎드려있거나 누워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다면 그냥 둔다. 방문을 열었는데, 본체만체해도 그냥 혼자 있고 싶은가 보다 하고 내버려둔다. 음언니가 나가고 싶어 하는 모습은 꽤 분명하다. 방문을 열었을 때, 억울한 듯 ‘음음’하고 우는 소리를 내면서 열린 방문과 나를 계속 보거나, 몸을 일으키거나 손을 잡아달라는 듯한 동작을 할 때다. 난 그럴 때만 거실로 데리고 간다.
아버지는 또 거실에 있던 음언니를 방으로 옮겨놓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늦은 밤 아버지가 텔레비전을 보면서 졸면 그 사이에 음언니가 경기라도 할까 싶어 괜히 걱정돼 방으로 옮겨 놓으려고 하면, 아버지가 막아선다. “그냥 둬 이따 내가 할게” 아버지는 최대한 음언니가 거실에 있었으면 하는 것처럼 보인다.
처음엔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버지는 거실에 음언니를 두기만 하지 같이 놀거나 간식을 주거나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음언니를 간간이 보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아버지 방에서 할 일이 있어 음언니와 같이 거실에 있지 못할 때도 음언니만 거실에 덩그러니 놓아두기도 하니 말이다. 그렇다고 음언니가 텔레비전을 보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거실에서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아버지는 왜 그럴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 기준에선 내가 음언니가 싫어할 것 같은 행동이라 그런 아버지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아버지가 예전에 내게 한 말이 떠올랐다. “거실에 나와 텔레비전도 보고 좀 편안하게 지내”
그때는 왜 하고 싶은 대로 두지 않고 강요를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난 방안에서 있는 게 더 재밌고 편한데 말이다. 그렇다고 아예 부모님과 소통을 안 하는 것도 아니고 그 부분도 좋아한다. 다만 조용히 책을 보거나 영화를 보고 생각 정리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고 싶은 것뿐이다. 그러다 아버지의 행동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왜 그런지 알 것도 같았다.
아버지는 반대로 텔레비전을 보거나 무엇을 할 때 거실에서 하는 걸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 낮잠을 잘 때도 거실에서 잘 때가 자주 있고, 밤에 잠에 들기 전까지도 거실에 있다. 또 밤에서 뭔가를 할 때도 문을 열어놓고 한다. 심지어 화장실을 쓸 때도 문을 열어놓기도 하고 도서관에서 공부할 때도 아버지는 큰 책상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개방된 형태를 좋아한다. 이것들만으로 단정할 순 없지만, 아버지는 탁 트인 것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성향인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아버지에게 집에서 ‘거실’은 행복을 상징하는 공간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무뚝뚝하고 썰렁하고 별로 재미있지 않다고 생각해서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 성향인 줄 몰랐는데, 그건 성향과는 별개였던 거다. 다른 사람을 웃기거나 본인을 중심으로 모이는 것은 재능이나 성격에 가까운데, 그것과 관계없이 아버지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고, 누군가와 연결되는 기분을 좋아하는 성향이었던 거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아버지가 음언니에게 했던 행동 들이 이해가 갔다. 아버지는 아버지가 기분이 좋았던 경험을 생각하면서 음언니에게 그렇게 했던 거였다. 또 나도 그렇고 엄마도 그렇다. 문제는 음언니가 정확히 어떤 성향인지 모르겠는 거다. 아무 소리도 안 내고 혼자서 며칠째 같은 장난감만 가지고 누워서 놀 때면 내향적인 것 같다. 그러다가도 할 일도 없는데 거실로 나가려 하고 또 거실에서 가족들이 떠드는 걸 보고 좋아하고 또 그러다가 편안하게 잠드는 걸 보면 외향적인 것 같기도 하다. 음언니의 진짜 성향이 뭐가 됐든 가족들은 음언니가 내는 음을 추측만 할 뿐이다. 분명하고도 같은 건 음언니에게 좋은 것만 주고 싶은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