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언니는 어느 누구의 욕을 먹을 일이 없다. 누구의 탓을 들을 일도 없다. 대부분 집에서 보내고 외부 활동이라고 해야 동네 산책 정도가 전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언니는 구설수에 오르지 않을 줄 알았다. 꼭 그렇지도 않았다. 음언니가 아무리 문제 일으키지 않고 집에서만 있으면 뭐 하나, 다른 사람들이 집 밖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다니는데.
“네 동생이 좀 그러니까...” 주말마다 운동하는 테니스 동호회 회원 중 한 분이 내게 말했다. 아버지가 가끔 분을 못이겨 테니스공을 발로 툭 찬다거나 판정에 불만을 품고 언성을 높인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나온 말이다. “아버지가 여기서 스트레스를 푸는 거야 동생이 아파서 돌보고, 해야 되니까...” 흠칫 놀랐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걸 처음 알았다. 하지만 그분은 틀린 것이, 아버지를 오래 보아온 내가 장담하건대, 아버지는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던 걸로 보인다. 다른 사람이 음언니의 아버지였다면, 음언니 때문에 그렇게 변한 건 아니라 생각한다. 아버지보다는 내가 문제다.
내가 음언니의 영향을 받은 행동을 생각해 보면, 언젠가 장애인 주차구역에 일반 차량이 불법 주차를 해놓은 것을 고깝게 여겨 신고를 한다거나 그런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동생이 일반적이지 못하다는 걸 아는 주변 사람들은 내 어떤 정상적이지 않은 행동, 이를테면 화를 참지 못한다거나, 예민하다거나, 우울해한다든가 하는 걸 보면 ‘동생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렇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 정말 생각해보면 그럴 수도 있다.
내가 유독 손해 보는 것에 민감하다거나 안정 추구 성향이 있는 것 역시 음언니의 영향이 있다. 내가 몸이 아프거나 경기를 하는 건 아니지만, 음언니의 존재 자체가 어린 내게 있어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모순이었다. 주변 친구들의 형제는 그런 사람이 없는데, 음언니만 몸이 약하고, 소통이 안 되고 때론 아파해야 한다는 건 억울했다.
좀 더 나이가 들어 음언니같은 존재도 있을 수 있다는 걸 이해하고 나서 역시, 음언니를 돌봐야 하는 부모님을 보며 괜히 억울한 마음이 든다. 이 역시 내가 돕는 건 거의 없지만, 마음 편히 여행을 가지도, 몇 시간 집을 비우지도 못하는 부모님을 보는 것 자체가 ‘왠지’ 억울했다. 왜인지 모르는 억울함은 차라리 분명한 이유가 있는 억울함보다 그 감정을 느끼는 사람을 비참하게 한다. 왠지 드는 감정은 이유가 정확하지 않아도 그 감정은 분명한데, 이유가 모호하다는 게 그 감정을 느끼는 걸 창피하고 좀스러워 보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찌질하고 정확히 표현하기도 어려운 감정이라 어디 대놓고 말도 못 하는 점에서도 괴롭다.
‘차라리 부모님이 음언니 생각하지 말고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 있으면 내게 맡기고 가시지...’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막상 부모님이 음언니를 가끔 내게 맡기기도 하면서 정말 자유롭게 생활했다면 또 그런 부모님을 원망스러워 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때는 부모님이 안쓰럽다는 생각을 하기보다 차라리 ‘으이구’ 하면서, 철없는 두분이 자유를 만끽하는 걸 보면서 원망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분명 시간이 지나면서 세상에 부당한 것은 많고 정말 억울한 일을 겪는 사람들을 봐와도, 아무래도 이 억울한 기분의 본질은 잘 사라지지 않는다. 한 번은 전 회사에서 회식할 때, 술을 잔뜩 먹고 선배에게 음언니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왜 그런진 모르겠지만, 음언니를 ‘병신’이라고 표현했다. 술에 취했는데도 나도 모르게 그 단어가 나온 것에 놀라, 또 그렇게 말한 스스로에 화가 나고 음언니에게 미안해 미안하다고 소리치면서 주먹으로 얼굴을 마구 쳤다. 아무리 취했어도 아팠는데, 점점 강해지는 통증만큼 스스로에 대한 분노가 강하게 일었다. 음언니로 인해 억울한 감정을 품고 있고 그 탓을 결국 음언니에게 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는 알지만 숨기고 싶고 없애고 싶은 감정이었는데, 결국 스스로도 그 감정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적나라하게 보여서, 그 순간 치미는 부끄러움과 화를 주체하지 못했으리라. 앞에 있던 선배가 말리자, 주먹으로 아스팔트 바닥을 쳤다. 끊임없이 자극이 있어야 그 감정과 순간을 견딜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음 날 일어나보니, 입술은 터지고 얼굴은 멍이 들었고 손도 퉁퉁 부어 있었다. 전날 기억이 어렴풋이 났지만, 모른 척했다. 높은 강도의 자기 연민과 이어지는 혐오는 가장 찌질한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날 내 모습이 그랬다.
나는 음언니를 정말 좋아하고 음언니가 없는 집은 상상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음언니가 아닌 다른 동생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많다. 그 생각은 무의식 또는 스치는 생각에 가깝지만, 분명 그렇다. 더 평범한 여동생이었으면, 아프지 않고 부모님을 덜 힘들게 했으면 하고. 혹은 없었다면, 더 편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했다. 이 모든 생각은 파도처럼 자연히 스며 들어 내 마음을 계속해서 쳐댔고, 하얗게 부스러져 무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나에 대한 실망, 음언니에 대한 미안함, 죄책감. 또 이런 모든 감정을 느끼는 것에 대한 자기 연민 이런 감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이 힘들어 때때로 가장 쉬운 감정인 분노로 바꿔 표출했는지도 모른다.
억울한 감정은 항상 집에 있는 음언니를 보아온 나를 지배한 감정이었다. 또 음언니가 경기라도 한다면 그 감정은 폭발해 속으로 비속어가 나왔다. 문제는 그 화의 감정이 어디로 향할지 몰라 해소가 안 된다는 점이었다. 음언니를 이렇게 만든 세상 탓을 하기에도 애매하고, 부모님 탓을 할 수도 없었다. 화가 나지 않아야 하는데 화가 났으니 그 화는 풀리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쌓이던 화는 어느덧 나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내 안의 분노를 음언니 탓으로 돌려 미성숙한 합리화를 하고 있었던 것인데, 결국 내가 감정을 조절하지 못했던 수많은 순간들이 한편으로는 음언니 얼굴에 먹칠을 한 격이 됐다. 따지고 보면 음언니라는 존재가 억울해서라는 탓을 하는 건, 그 전에 나라는 존재가 있어서 그렇게 느낀다는 것이니 결국 모든 원인은 나인 것이고, 내가 단지 많이 억울해하고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성격인 탓이다. 정작 아프고, 몸을 마음대로 못해 답답한 당사자인 음언니도 깔깔 웃으며 가만히 있는데 말이다.
으히려 음언니는 날 가르치거나 기르지도 않았는데 어디 가서 성격 안 좋은 오빠 때문에 입방아에 오른다면 그것만큼 억울한 일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