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헤밍웨이 - 무기여 잘 있거라
평소의 나는 역자의 말을 잘 읽지 않는다. 그건 역자의 말 대부분이 소설 말미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큰 몫을 했는데, 아직 소설 속 세계관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내 정신에 조금의 여유와 해석의 자유를 선사하고 싶은 마음이 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요상한 기피 현상은, 소설에 대한 만족도가 높을 수록 더 확실하게 발생해 왔던 것이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 어제 밤 완독을 마친 후, 정말이지 오랜만에 역자의 말을 하나 읽었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지루하고 따분했던 것이냐고? 천만에, 나는 이 책을 정말이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읽어버렸다. 내가 이번 역자의 말을 건너뛸 수 없었던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아무래도 ‘제목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 가장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또 다른 이유로는, ‘차마 이대로 결말일 줄 모르고 장을 넘겼는데 바로 다음 장에 역자의 말이 나와버려서’ 등이 있겠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사산된 아기. ‘무기여 잘 있거라’라는 언뜻 시적으로도 느껴지는 제목과 그리 어울리지 않는 결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작중의 주인공이 초반부에 전쟁으로부터 도망치며 일종의 작별을 선언하기는 하나, 나에게 박힌 헤밍웨이의 이미지가 사뭇 편집증적인 것이어서, 그가 작품 초반의 이미지로만 제목을 정했을리는 없을 것이라 여긴 것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역자의 말에 그 비밀이 있었다. 작품의 원문 제목 ‘A Farewell to Arms'에서 Arms가 ‘무기’ 뿐 아닌 ‘양팔’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그 감정이란. 어떠한 전율이 몸을 싹 훑고 지나갔다가, 이내 나 자신을 꾸짖을 수밖에 없었다. 작품의 말미에, 주인공이 아내의 시체와 독대하는 장면을 ‘조각상과 작별하는 느낌’이라고까지 묘사해 놓았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비밀은 책 머리에서부터 열심히 손을 흔들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 헤밍웨이는 이 책을 통해 작별 자체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결별을 맞은 지인이 있을 때 줄곧 한다는 이유로, ‘만남이 있으면 작별이 있다’는 말은 이제 우리에게 너무나도 흔한 말이 되었다. 하지만 그 흔함이 오히려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다는 생각도 한다. 만남과 작별이 한 묶음이라는 말은, 지금 우리 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떠난다는 저주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주인공 프레드릭 헨리는 정말이지 저주받은 인물이다. 작품은 그가 홀로 남으며 완결된다. 그간 만났던 수많은 인물은 모두 떠났다. 글을 읽는 독자는 물론이고 프레드릭 헨리 그 자신도 잊었을 여러 이름의 바텐더들과 호텔 벨보이들. 전선에서 함께 싸웠던 전우들과 친구들…. 그중 어느하나 마지막에 남은 이가 없다. 사랑했던 아내의 시체와 탯줄을 목에 감고 사산된 아기를 뒤에 남기고, 주인공은 비를 맞으며 쓸쓸하게 호텔로 걸어갈 뿐이다.
헤밍웨이는 또한, 작별은 여러 모습으로 다가옴을 여실히 말하고 있기도 하다. 세상에는 스스로 선택한 작별도 있거니와, 어떠한 약속으로도 피할 수 없는 작별도 다가오기 마련이다. 주인공 프레드릭 헨리는 탈영을 행함으로 인해,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게 된 전쟁과의 작별을 선언했다. 그길로 그의 삶에는 유례없던 행복이 찾아왔고, 아내와의 사랑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쏟아지는 듯한 작별의 빗줄기였다. 진통을 겪는 아내에게 굳게 약속했던 것과는 달리 아내는 세상을 떠났고, 그녀의 뱃속에서 자라고 있었을 그들 사이의 매듭은 첫 호흡을 내뱉지 못했다.
주인공 프레드릭 헨리의 작중 행적은 헤밍웨이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겪은 경험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그 또한 오스트리아-이탈리아 전선에서 구급차 운전병으로 활약했으며, 한 여인과 사랑에 빠졌지만 결실을 맺지 못했다. 그 결말이 여자 쪽의 바람이었다니, 헤밍웨이가 겪었을 슬픔도 컸을 것이다. 소설의 말미에서 남은 모든 것들과 작별하게 된 순간, 그때 프레드릭 헨리가 느꼈을 감정에 대한 서술은 이상하리 만치 담담하기 이를 데 없다. 그때의 묘사를 삼킨 것이, 평소 마초적인 이미지로 알려졌고 또 그렇게 보이고 싶어 했던 헤밍웨이가 챙긴 자존심은 아니었을까-하며 글을 마친다.
만남은 축복이고, 작별은 저주다. 글을 정리하면서, 나 또한 그러한 저주를 품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견디기가 힘들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린 간단한 문제임을 부정할 수 없지만, 당분간은 내 주위 것들에 대한 슬픈 생각들을 떨치기 힘들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