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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가을 Mar 10. 2020

3월 둘째 주 짠 맛

오늘의 식단: 양파 카레

난리 통에도 기어코 봄은 온다. 지난 토요일은 종일 어둡더니 일요일 거리에는 패딩과 반팔을 입은 사람들이 뒤섞여 걸었다. 그 혼란하게 화창한 날씨가 월요일까지 이어졌다. 마음이 어두운 날에 날씨가 좋으면 어쩐지 더 우울해진다. 심신이 고단하니 식욕을 돋울 만큼 향이 강한 음식이 먹고 싶어져서 일요일부터 카레를 떠올렸다. 여러 재료가 들어간 포화 상태 카레도 좋지만 이날은 단출하게 만들 수 있는 카레가 더 당겼다. 그간 동네 공판장만 들르다가 이번에는 대형마트에서 장을 봤다. 잔뜩 쌓여 있는 야채, 과일, 조미료(특히 굴 소스와 연두)들을 보자니 뭘 하나라도 더 넣고 싶고, 간편 조리식품 판매대 앞에 서니 그냥 다 귀찮고 전자레인지에 후루룩 돌려서 아무거나 먹고 싶기도 했다. 유혹을 뿌리치고, 꽤나 힘겹게 처음부터 사려고 했던 양파 하나와 고체 카레, 마가린을 샀다.   

 

양파를 썰 때 입에 뭔가를 물고 눈물이 나지 않는다고 하던데. 칼? 너무 괴이해. ‘ㅏ’ 라임이었는데. 양파 써는 사각 소리와 칼이 도마와 맞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며 떠올리려 애썼다. 파! 파를 물고 양파를 썰면 눈물이 안 난다고 했다. 순간 찔끔찔끔 매일같이 분노하고 울다가 감당하기 어려운 슬픈 일이 생겨 도리어 벙쩌버린 상태가 되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뭉게뭉게 떠오른 별스럽지 않은 회사에서의 일상을 휘휘 헤치고 프라이팬에 마가린을 두른다. 엄청 많이. 썰어둔 양파를 볶는다. 고소한 향이 퍼진다. 그냥 이것만 먹어도 맛있겠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그건 아니지.

애초에 단출한 요리를 지향하며 택한 메뉴였는데 양파를 볶고, 볶고, 또 볶아도 색이 안 변한다. 하얀 양파가 갈색을 띠어야 볶음 지옥 탈출인데 너무 많은 마가린이 양파를 단단히 보호하고 있었다. 오른팔을 요리조리 휘적대다가 어설프게 왼팔까지 써본다. 야무진 인덕션은 온도가 어느 정도 오르기만 하면 속도 모르고 자체 오프를 시전한다. 프라이팬을 살짝 들어 올렸다가 다시 내려놓고, 불이 오르면 다시 볶고, 온도가 오르면 또 불이 꺼지고, 프라이팬을 들고... 그렇게 30분이 넘도록 볶으니 그제야 갈색으로 변했다.

양파를 냄비에 옮기고 물을 부어 같이 끓이기 시작했다. 끓는 물에 고체 카레를 풀자마자 고체가 녹으면서 물에 겨자색이 번져나갔다. 눈 떠보니 봄이 온 것처럼 단단하던 덩어리는 금세 녹아 액체 전체를 노랗게 물들였다. 그 액체가 조금 끈덕져질 때까지 한참을 끓여(여전히 인덕션은 야무졌고) 겨우 테이블에 올렸다. 그리고 아직 기름이 남아 있는 팬에 식용유를 살짝 한 번 더 두르고 계란 프라이를 했다. 밥그릇에 담긴 밥 한편에 카레를 붓고 그 위에 계란 프라이를 올리니 이게 뭐라고 부자가 된 것 같았다.


숟가락으로 크게 한 입 떠서 입에 넣는데 삐빅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1시간 35분간 세탁부터 건조까지 모든 과정을 끝낸 세탁기가 종료를 알리는 소리였다. 이 세탁기는 조리를 시작하기 직전에 작동시켰다. 화구가 두 개라면 상황이 달랐을까... 화구가 네 개인 집에서 2인분의 요리를 아침, 저녁으로 하고 있을 엄마가 이곳에 와서 요리했다면 달랐을까. 카레는 기름지고 짭짤했다.    


요즘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은 어디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안팎으로 걱정되는 일도, 번잡할 일도 많다. 그 와중에 입에 음식을 집어넣는다. 오늘을 살아낸 것에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으로.

 

오늘의 식사 메이트: 곡 ‘사라지는 꿈’ - 술탄 오브 더 디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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