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촌, 향도 (15)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초라합니다. 울타리가 튼튼하지 않았다면 진즉 나와 세계의 경계는 무너지고 나는 나를 잃어갔을 겁니다. 나는 감사합니다. 나의 울타리들에게. 아버지 당신에게, 이제 예순이 되어 한 갑자를 다 채워가는 아버지에게 뭣도 해주지 못한단 사실은 슬픕니다. 여느 때처럼 나는 그래도 누나는 잘 됐잖아, 말하며 편히 웃어넘겨 보일 겁니다. 언젠간 당신이 없는 내가 되어야 할 겁니다. 나 역시 누군가의 울타리가 되어야 할 겁니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여기 시 한 편이 있습니다.
'이야기는 동의 없이 시작됐다가 동의 없이 끝난다
(중략)
이야기는 끝났지만
너는 젖은 페이지의 귀퉁이를 접고
미래의 화단을 찾는다
아무것도 상상할 수가 없어서 '
/ 김소형, 「죽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마음」
당신 없는 나는 여전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아득하디 먼 미래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간혹 삶의 미련이 없어 보이는 당신이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나는 욕심이 많습니다. 세 살 때 보았던 그대의 미소는 서른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로 순수합니다. 제가 아는 그 누구의 웃음보다도 환하고 밝습니다. 당신을 오래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지금처럼 천진난만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또 다른 시를 찾았습니다.
'단호하게 말하던 네가
사는 게 두렵다고 말할 때
사는 게 두렵지 않다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어?
한없이 가볍게 말하는
나를 잃어버린 내가 좋아'
/ 김소형, 「Being Alive」
당신이 한없이 가볍게 말하고 행동하고 웃고 슬퍼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너무 많은 짐을 지고 지냈으니까요. 나는 당신이 지금처럼 순수한 웃음으로 오래도록 나를 지켜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맞습니다. 나에게는 딱 그만큼의 욕심이 있습니다. 당신이 나의 욕심을 들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