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베짱이 Jul 21. 2020

기다리고 준비 한다는 것

그냥 아프기만 하면 끝인 줄 알았다.

오늘은 1월 2일 새해 다음 날이다. 

그리고 오늘은 유도분만을 하는 날! 사실은 유도분만이라는 글자 자체도 아직 낯선 단어인데 이제는 하도 인터넷으로 검색을 많이 해 봐서 이미 머리속으로는 그 과정을 다 알아버린 느낌이다. 글로 공부하는 거에는 자신있는 건가...


사실 유도분만을 하기 전에 신호가 오길 바랬지만, 뭐 마음대로 다 되겠는가? 연말에 딱 맞게 스케줄을 잡아준 병원에 감사할 뿐이다. 사실 이렇게 병원이 바쁜줄 상상도 못 했다. 우리는 우리가 고른 날짜에 우아하게 가서 힘 한번 딱 주고 아기 받아 나오는가 했더니, 결국엔 우리가 장보러 갔다가 공원 산책하면서 했던 긴 대화들 (몇 일에 아이를 낳을까? 몇 일로 유도분만 예약을 할까?)은 현실에선 다 이루어지긴 힘든 것들이었고, 결국엔 상황이 되는대로 하는 수 밖에. :)


다행히 남편이나 나나 항상 그냥 쉽게 가는 편 (easy going)이고, 물흘러가는대로 맡기는 것에 별 문제가 없는 사람들이라 그냥 그렇다고 하면 아, 그렇구나 하고 지나가서 다행이다. (뭐, 그렇다고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딱히 없고..) 그렇게 하여 잡혀진 유도분만 날짜. 딱 예정일 바로 전날 저녁이다. 기다릴 때 까지 기다려보고 유도분만을 하고 싶었던 나로서는 딱 잘 된 것 같다! 너무 늦어지기 전에 아기가 자기 나오는 데 쪼금만 도움을 달라고 하는 신호일 수도 있고. :) 그리고 우리가 은근히 바라던 택스 공제 혜택은 어차피 물건너 갔으니 뭐 그건 생각하지 않기로. 후후 올해에 받으면 되지뭐.


자연적으로 진통이 오기를 바라면서 공원도 많이 걷고 (다행히 갑자기 이번 일주일 동안 날씨가 너무 좋았다!) 인터넷에서 사람들이 민간요법으로 말하는 것들 (짐볼 운동, 스테이크, 매운 음식, 라즈베리 잎 차, 등등)도 한번 씩 시도해보고. 그리고 오랜만에 얻는 긴 휴가로 티비, 영화도 실컷 보고 그냥 남편이랑 집에서 준비하면서 쭉 같이 쉬고. 사실 지금까지 너무 좋았다. 일단은 정당한 이유가 있으니까 (아기가 언제 나올지 모르니) 계속 어디 가지말고 쉬어줘야 하고, 학교 일은 일단은 다 무조건 스탑이고. (생각하기도 싫다 다시 돌아가는거....) 어디 여행은 못 가니 그냥 집에서 진짜 오랜만에 멍하니 쉬어보는 것. 우리에게 너무나 필요한 시간이었다.


사실 아가를 맞을 준비라는게, 마땅히 시작과 끝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필요한 것들을 생각해냈다. 방청소, 차 청소, 카 시트 청소 부터 시작해서 빨래, 필요한 물건 구입, 신생아 돌보는 공부 등등 할 일은 무궁무진 했다. 이것까진 꼭 해 놓고 병원을 가야겠어 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하나둘씩 끝나갈 때마다 기분이 좋긴 했는데, 뭔가를 끝내면 다른 것들이 계속 다시 또 생겨나니 끝낸 다는 것이 뭐 그렇다 할 의미가 있는 것은 사실 아니었다. 결국은 뭐 시간이 되어야 일이 진행되는 것이고 또 예정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니깐. 


이 세상에 없던 존재가 오는 것이라 그런지, 참 느낌이 신기했다. 아, 이 사람은 놀러오는 사람 처럼 자기 물건을 자기 가방에 싸오진 않는구나. 양말부터 손톱깎이까지 하나 둘씩 필요한게 참 많았다. 그리고 항상 우리둘만 살던 이 집에 처음으로 (개 말고) 누군가 살러 들어온다는 것도 참 뭔가 이상한 느낌, 컨셉이다. 오늘부터 너는 여기에서 살거야 우리랑 같이. 마음에 드니? 우리가 니 룸메이트다. 니가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ㅋㅋ 아 이상해.


문득 공원을 걷다가 이렇게 한 생명을 위해 준비하고 기다린다는 게 문득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랑 비슷한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자기가 언제 죽을 지를 알고 있는 경우에만 (아기 예정일을 아는 것 처럼). 내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것도 마무리 하고, 이것도 먹고, 이 사람들도 미리 만나서 인사도 하고, 여기도 가보고. 결국은 시간이 허락하는 한 하겠지만. (큰 수술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지금 분만을 하러 가는 이런 상황에도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나도 진짜 럭키한 인생을 살았던 것 같다.) 우리도 아기 뿌뿌가 나오기 전에 이것도 준비하고 이것도 미리 해 놓고 하는 것들을 대충 준비하고 나니 그냥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모든게 자연의 섭리라 여기며.


그냥 배만 나오고 허리 좀 아프고 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조용히 차분하게 아기를 기다리는 것도 정말 큰 일이구나 하는 걸 알게되었다. 미리 와서 같이 대기 하고 있던 오서방네 식구들에게 약간 좀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 말고는 다 괜찮았지만 빨리 그냥 나와서 엄마아빠랑 놀지 하는 조바심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아기가 최대한 뱃속에서 예정일 까지 있다가 나오는게 건강한 아기를 만드는 것이라고 하니 기다리자. 기쁜 마음으로! 


2020년 1월 2일

작가의 이전글 글로 뭔가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