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인후 Jun 24. 2024

원고를 다시 쓰라는 말을 3번 듣고 키보드 입스가 왔다

혹독했던 '넥스트 커머스' 출간 과정

한여름의 찌는 듯한 열기 속에서 나는 또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모니터 화면의 빈 문서가 나를 조롱하듯 여백의 미를 자랑했다. 


"아무래도 다시 쓰셔야 할 것 같습니다." 


대표님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이미 세 번의 좌절을 겪은 나에게 이 네 번째 도전은 마지막 기회처럼 느껴졌다.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완성한 세 개의 원고가 휴지통으로 향하는 동안,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모든 것은 일 년 전, 평범한 어느 날 페이스북에서 시작되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한 대표님의 출간 프로젝트 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흥미가 있었지만 망설였다. 출판 경험도, 네트워크도 부족한 내가 과연 이 프로젝트에 어울릴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어 지원했고, 운 좋게도 마지막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아, 이게 바로 운명인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이것이 단순한 운명이 아닌, 개미지옥의 시작이 될 줄은.



킥오프 미팅 날, 경험 많은 작가들 사이에서 나는 불안감을 감추려 애썼다. 중년의 남성들로 가득 찬 회의실은 마치 늑대 무리 속에 던져진 토끼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애써 긴장하지 않은 척 다리를 꼬고, 깊이 생각하는 듯 미간을 찌푸려 보았지만, 마음 한구석의 불안감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이 프로젝트를 제안한 대표님은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중도 포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당시에는 그건 남의 이야기라고 확신했다.


첫 번째 원고를 위해 나는 몇 주 동안 혼신의 힘을 다했다. 평소 관심은 있었지만 글로 다뤄본 적 없는 주제라 방대한 양의 해외 기사와 논문을 뒤지며 깊이 파고들었다. 밤낮없이 노력한 끝에 완성한 원고였기에, "주제가 신선하지 않다"는 평가와 함께 40장의 원고가 폐기되었을 때의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렵게 완성한 레고 작품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좌절도 사치라는 생각으로 다시 새로운 주제로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두 번째 시도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나는 일종의 '작가의 입스'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야구에서 입스란 선수가 극도의 부담감이나 불안감으로 인해 간단한 동작조차 수행하지 못하는 심리적 장애를 말한다. 투수가 공을 던지지 못하거나, 내야수가 1루로 송구를 하지 못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작가에게도 이와 유사한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나 역시 그 '작가의 입스'에 사로잡혔다. 컴퓨터 앞에 앉아 모니터를 응시하지만, 손가락은 키보드 위에서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또다시 거절당하면 어쩌지?'라는 두려움이 나를 옭아매었다.


빈 화면은 마치 거대한 백지처럼 느껴졌고, 깜빡이는 커서는 나를 조롱하듯 일정한 간격으로 반짝였다.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생각들이 소용돌이쳤지만, 그 어떤 것도 화면 위로 옮겨지지 않았다. 마치 투명한 장벽이 내 머리와 손가락 사이에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키보드라는 마운드 위에 선 투수였지만, 글이라는 공을 던지지 못하고 있었다. 손가락을 움직여보려 했지만, 마치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심장은 빠르게 뛰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



하지만 포기할 순 없었다.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검지 손가락을 'N' 키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힘주어 눌렀다. '딸깍' 소리와 함께 화면에 첫 글자가 나타났다.


그 순간, 마치 마법처럼 얼어붙었던 손가락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한 글자, 한 글자 타이핑을 이어갔다. 처음에는 더디고 어색했지만, 점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손가락은 키보드 위를 질주했고, 화면은 글자들로 채워져 갔다.


밤새 타이핑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때로는 막히기도 하고, 지웠다 다시 쓰기를 반복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동이 틀 무렵, 나는 두 번째 원고를 완성했다.


그러나 운명은 또다시 나를 시험했다. 제출한 원고는 또다시 거절당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비록 결과는 실패였지만, 나는 '작가의 입스'를 극복했다는 사실에 작은 안도감을 느꼈다. 이제 나는 다시 글을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세 번째 도전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당시 컷오프를 넘지 못한 원고를 따로 정리하여 다른 매체에 기고하고 했을 정도였다.


당시 컷오프를 넘지 못하고 다른 매체에 기고했던 글들


하지만 감동의 반전은 없었다. 세 번째 원고마저 안된다는 얘기를 하면서 대표님은 갑자기 내 경력에 대해 물으셨다. 다사다난했던 내 커리어를 설명하자, 대표님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그 말은 딱히 특출 나게 잘하는 것은 없다는 말로 들리네요"


그의 말은 차가운 겨울바람처럼 날카로웠다. 순간 당혹스러움이 밀려왔지만, 이내 그 말이 내 안의 잠자던 투지를 깨우는 것을 느꼈다. '좋아, 누가 끝까지 가나 한번 붙어보자고. 적어도 내가 먼저 백기를 들진 않을 테야.'


"이번에는 작가님이 잘하는 걸로 가보죠. 뭘 잘하세요?" 


대표님의 질문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폰트 크기 10으로 빼곡히 채운 A4 80장의 실패작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 와중에 문득, 내가 진정으로 자신 있는 분야가 떠올랐다.


"해외 기업 분석한 글을 많이 썼었습니다." 


내 대답에 대표님은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럼 테무, 징동닷컴, 쉬인 같은 중국발 커머스 기업에 대해 써보는 건 어떨까요?"


세 번의 좌절을 겪으며 얻은 교훈과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하리라 다짐했다. 모니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 가장 열정을 느끼는 분야였다.


밤이 깊어갈수록 글은 물 흐르듯 술술 풀려나갔다. 중국 커머스 기업들의 혁신적인 전략, 그들의 성공 비결, 글로벌 시장에 미치는 영향까지, 그동안 쌓아온 지식과 경험이 글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동이 틀 무렵, 마지막 문장을 완성했다.


며칠 후, 대표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렇게 잘 쓸 수 있으면서 처음에 왜 그렇게 헤맸어요?" 


그의 목소리에서 놀라움과 함께 인정의 뉘앙스를 느꼈다. 마치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 같았다. 그 순간, 그동안의 모든 고난과 좌절이 봄눈 녹듯 사라지는 듯했다. 대표님은 내친김에 알리익스프레스, 쇼피, 핀둬둬, 알디와 같은 기업을 추가로 다뤄보자고 하셨다. 덕분에 나는 이 책의 최대 주주가 되었다. 3번의 좌절 끝에 얻은 성과라 마치 꿈만 같았다.


도서 '넥스트 커머스', ⓒ클라우드나인


서점 입구에 들어서자 발걸음이 자연스레 멈췄다. 책장 사이로 익숙한 표지가 눈에 들어왔고, 그 위에 선명히 박힌 이름이 현실감을 더했다. 천천히 다가가 책을 집어 들자 예상치 못한 무게감이 손에 전해졌다. 그것은 단순한 종이와 잉크의 무게를 넘어, 그 안에 담긴 수많은 밤과 좌절, 그리고 결실의 무게였다.


책을 펼치자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가 시간을 되돌리는 듯했다. 한 장 한 장이 지난날의 여정을 되새기게 했다. 새벽까지 이어진 퇴고의 밤들, 거절의 쓴 맛,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들... 그러나 동시에 각 문장에는 쏟아부은 시간과 고민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주변의 소음이 멀어지며, 오직 심장 소리만이 고요한 서점을 채웠다. 그 울림 속에서 깨달음이 스며들었다. 삶이란 결코 곧은 길이 아니라는 것. 그것은 오히려 험난한 산길과 같아서, 때로는 절벽 앞에 서기도 하고, 미끄러운 돌길을 지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사람은 더 강해지고, 더 현명해진다.


책을 다시 진열대에 조용히 꽂았다. 이 책이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누군가가 이 책을 통해 자신의 길을 찾는 데 조금이나마 힘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주변의 부정적인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 노력을 인정받는 날이 올 거라고.


서점을 나서는 발걸음은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마음은 조금 더 가벼워진 듯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야겠다는 조용한 다짐을 하며, 일상으로 돌아가는 길을 걸었다.


도서 '넥스트 커머스', ⓒ클라우드나인


매거진의 이전글 "이런 제품들 예전에 다 실패하지 않았나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